지난 해 겨울 일본 근대문학 답사의 일환으로 규슈에서 홋카이도까지 일본을 횡단하고 왔다. 시간순으로 쓰면 좋겠지만 카테고리별로 정리한다.
♣ 도고온천역 주변에서
도고온천역에 도착하자마자, 오래된 역사와 현대적인 감각이 어우러진 독특한 분위기가 눈에 들어온다. 특히 이 역에 자리한 스타벅스는 도고온천의 전통적인 느낌과 현대적인 세련됨이 조화를 이룬 공간으로, 인상 깊은 경험을 선사한다. 일반적인 스타벅스와 달리 이곳은 일본 전통 건축을 모티프로 삼아 꾸며져 있어, 주변의 온천 마을 풍경과 잘 어우러지면서도 세련된 감각을 잃지 않고 있다.
도고온천역 앞에 자리한 봇짱 열차 조형물은 단순한 관광 조형물이 아닌, 일본 근대 문학의 거장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도련님을 마쓰야마의 풍경 속에 생생히 되살려 놓은 상징적인 공간이다. 이 조형물을 바라보면 소설 속 주인공이 다녔던 그 옛날의 마쓰야마가 머릿속에 그려지듯 생생하게 떠오르게 된다. 특히 열차의 고풍스러운 디자인과 세밀하게 재현된 외형은 그 자체로 오래된 시간과 지금의 현실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처럼 느껴진다.
이 열차는 나쓰메 소세키가 교사로 근무했던 마쓰야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도련님 속의 주인공이 타고 다니던 바로 그 봇짱 열차를 모티프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보는 순간 소세키의 발자취를 따라 잠시나마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 마치 소설 속에서 자유롭고 강직한 인물로 묘사된 도련님이 타고 있던 열차가 눈앞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곳에 서 있으면 소세키가 담아낸 당시 마쓰야마의 일상과 풍경을 몸소 느끼는 듯해, 문학과 현실이 맞닿는 그 특별한 지점에서 마쓰야마라는 도시와 일본 근대 문학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얻을 수 있는 것이 흥미롭다.
♣마사오카 시키의 흔적을 찾아서
도고온천역에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발길이 닿은 곳은 마사오카 시키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역 근처에 자리한 그의 동상은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특히 동상이 야구 배트를 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 독특한 모습은 단지 그의 문학적 업적뿐만 아니라 학창 시절 야구 선수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던 시키의 이색적인 면모를 드러내 준다. 포수와 피처로서 활약하며 팀을 이끌었던 시키는 일본 야구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영어 용어 ‘숏스탑(Short Stop)’을 ‘유격수(遊擊手)’라는 용어로 번역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번역 덕분에 지금까지도 일본과 한국 야구 용어에 ‘유격수’라는 표현이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시키는 1867년에 태어나 불과 35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병마와 맞서 싸운 시간은 길고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결핵에 걸려 침대에서 거의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그의 문학 열정은 식지 않았고, 말년에 가까워지며 오랜 친구였던 나쓰메 소세키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염려하기도 했다.
특히 소세키는 런던 유학 중에도 시키를 잊지 않고 그의 건강을 염려하는 편지를 보내곤 했다고 한다. 그 애틋한 우정과 투병 중에도 지치지 않았던 시키의 문학적 열정을 기리며 세워진 시키 문학관은 그래서 꼭 들르고 싶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기대를 안고 도착한 문학관 입구에서는 뜻밖의 안내판이 나를 멈추게 했다. 하필 오늘이 화요일이라 휴관일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한동안 그 자리에서 멍하니 안내판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음에 다시 올 것을 기약한 채 발길을 돌려, 다시 도고온천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도고온천으로
도고온천을 찾은 첫인상은 익숙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였다.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등장하는 욕탕이 이곳을 모델로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더욱 기대가 되었다. 물론 도고온천이 영화의 유일한 모델은 아니지만, 건물과 온천의 모습에서 영화 속 장면들이 떠오르니, 그 속에 들어온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도고온천에는 전설도 깃들어 있다. 옛날에 이곳의 온천수가 신들의 병도 치유할 만큼 신비한 효험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도고온천 건물은 1894년에 지어진 것으로, 근대적이면서도 전통적인 일본 건축 양식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세월을 이겨내고 온천을 찾는 이들을 계속 반겨온 도고온천의 모습은 신비로운 아우라가 감돌고, 그 안에 들어서면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준다.
실내는 비교적 단출한 구성이다. 입장료는 610엔, 그리고 탈의실과 욕탕이 마련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면, 19세기 메이지 시대의 온천 욕탕이 고스란히 보존된 것을 볼 수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도련님 속에서 주인공이 이곳에서 온천욕을 즐겼다는 묘사를 떠올리며 욕탕에 발을 담그니, 그와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감회 깊게 느껴졌다.
도고온천의 물은 유달리 따뜻하고, 피부에 닿는 감촉이 부드러워, 온몸을 감싸는 따스함이 근심을 씻어내는 듯했다. 왜 이곳이 일본 3대 고온천 중 하나로 꼽히는지 몸소 느낄 수 있었다.
♣ 마쓰야마역 앞의 중식당 하얼빈
마쓰야마역 앞에 자리한 중식당 하얼빈에서 저녁을 먹으며 하루의 피로를 푸는 시간은 그야말로 작은 위로였다. 고즈넉한 저녁 공기를 맞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소박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메뉴판을 넘기다 눈에 들어온 것은 친자오로스, 고추잡채였다. 익숙한 향이 코끝을 스치며 한국에서도 자주 먹던 그리운 맛이 떠올라 자연스럽게 주문했다.
잠시 후, 나온 친자오로스는 고소한 향을 자랑하며, 윤기 나는 돼지고기와 아삭아삭한 피망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한 입 먹자 입안에 감도는 풍미가 하루 동안의 피로를 잊게 해주었다. 알맞게 볶아진 돼지고기와 아삭한 피망이 만나 씹는 재미를 더해주었고, 적당히 매콤하면서도 짭짤한 양념이 입맛을 돋웠다.
식사를 하며 오늘 하루를 되짚어보니, 이곳에서 만난 다양한 풍경과 장소들이 떠올랐다. 피곤했던 몸도 맛있는 한 끼로 채우니 서서히 풀리는 기분이었다. 왁자지껄한 식당 안에서 홀로 친자오로스를 음미하며 조용히 앉아 있으니, 마쓰야마에서의 이 소박한 저녁이 참 소중하게 느껴졌다.
♣ 다카마쓰로
하얼빈에서 저녁을 마친 후, 차분한 마음으로 다카마쓰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다카마쓰는 이번 여정에서 모리오카로 가기 전의 경유지로, 특별히 오래 머물 예정은 아니었지만, 짧게나마 이곳의 분위기를 느껴볼 생각에 설레었다. 다카마쓰는 특히 본고장 카가와 우동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이번에는 우동 투어를 제대로 할 시간이 부족했다. 이 점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언젠가 다시 이곳에 와서 마음껏 즐길 것을 기약하며 미련 없이 다음 여행지로의 여정을 이어갔다.
저녁 무렵 다카마쓰역에 도착하자, 어둑해지는 역 주변이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잠깐 역 주변을 걸으며 거리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이른 저녁인데도 상점가나 가로등 불빛이 은은하게 비치면서 다카마쓰 특유의 평온한 정취가 감돌았다. 이렇게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카마쓰의 분위기를 흠뻑 느끼고, 내일의 긴 여정을 대비해 역 근처에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기차를 타고 모리오카로 향하는 신칸센에 올랐다.
기차가 힘차게 달리며 창밖으로 일본의 아름다운 풍경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후지산이 보이는 순간, 설렘이 가득했지만 아쉽게도 그날은 후지산 정상 부분이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선명한 후지산의 모습을 기대했던 만큼 아쉬움이 남았지만, 고요한 구름 사이로 드러나는 후지산의 실루엣도 그 자체로 인상적이었다. 그런 감상을 안고, 모리오카까지 이어지는 기차 여행은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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