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패망이 점차 다가오고 있던 1944년 9월 말, 식민지 조선의 시인 김종한은 급성 폐렴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여기에 번역해 소개하는 글은 노리타케 카즈오(則武三雄, 1909-1990)가 그런 김종한의 죽음을 애도하며 『국민시인(國民詩人)』(朝鮮文人報國會詩部會 機關誌, 第四卷四號)에 발표한 것이다.
이 글을 번역 소개하면서 다음 두 가지에 주목해 봤다.
첫째, 『국민시인』이라는 매체의 존재와 김종한의 일본어 시 「광진」의 발견이다. 이 글을 보고 일제말 인문사(人文社)에서 발행한 『국민시인』이라는 잡지의 존재를 실제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동안 이 잡지는 1945년에 발행된 것으로 일부 연구에서 다뤄져 왔으나, 이는 적어도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서정주가 관여했다고 회자되고 있는 『국민시인』 창간호가 언제부터 나왔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이 글이 게재된 것이 제4권 제4호였음을 보면 이 잡지는 적어도 1944년 12월 이전에 나왔음을 알 수 있다. 노리타케의 글과 함께 소개된 김종한의 시 「광진」 또한 주목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시는 일본에서 나온 『金鍾漢全集』(大村益夫他編, 緑蔭書房, 2005.7)에도 수록되지 않은 것이다.
둘째, 일제 말 경성문단 내의 일본인 작시와 조선인 작가 사이의 실질적인 교류의 구체적인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노리타케는 김종한은 물론이고, 서정주 그리고 백석과도 친밀하게 교류하면서 일제 말 경성문단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노리타케는 일제가 패망한 이후, 자신의 고향이 아닌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가 소개(疏開)해 있던 후쿠이(福井)를 방문한 후 그곳에 남아 지방과 관계된 시를 써서 남겼다. 현재 일제 말 경성에서 활동했던 그 어떤 작가보다도 노리타케는 전후(戰後) 일본에서 명성을 쌓았다(후쿠이현립도서관에는 노리타케 가즈오 문고가 있다). 노리타케는 전후 후쿠이에서 일제 말 경성에서의 만난 작가(특히 백석)와 관련된 시를 남겼다.
일제 말 전쟁 상황이 악화되면서 일제는 소설보다도 시를 전쟁과 관련된 프로파간다에 활용하려 했다. 1944년 말 일본에서 나온 『詩集 大東亞』(日本文學報國會編, 河出書房, 1944.10)에는 200명에 가까운 시인이 전쟁 협력시를 써냈다. 같은 시기에 나카무라 무라오(中村武羅夫)를 대표로 한 일본문학보국회에서 『大東亞戰詩』(龍吟社, 1944.10)를 2천부 찍어 낸 것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던 전쟁 상황을 말해준다. 요컨대 이미 1944년 10월 10일 미군이 오키나와를 공습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는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긴 소설보다는 시가 창작 기간은 물론이고 독해 시간에서도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일제 말에 프로파간다 시가 많이 창작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고찰될 수 있으며 『국민시인』의 창간 또한 그런 연장선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김종한의 「광진」 은 전쟁시로 볼 수 있는 요소가 있지만, 프로파간다 시로 보기에는 시가 지나치게 추상적이다. 일본에서 같은 시기에 나온 『詩集 大東亞』에 실린 직설적인 전쟁 찬미 시와는 구별되는 부분이다. 다만 이는 김종한의 전체 시 및 생애 가운데 평가돼야 할 것이다.
◆ 참고 문헌
고봉준, 「일제 후반기 국민시의 성격과 형식」, 『한국시학연구』37, 한국시학회, 2013.8.
장인수, 「노리타케 가즈오(則武三雄)와 식민지 조선의 문단」, 『한민족문화연구』47, 한민족문화학회, 2014.
한성례, 「조선에 온 일본 시인들, 그리고 이색적인 시인들」,『유심』45호, 2010.7.13.
김종한에 대한 추억 / 1944년
노리타케 가즈오(則武三雄)
짧은 문장으로 한 인물의 생애를 쓰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김종한 군에 대해서는 훗날 다시 쓸 기회가 있으리라 보기에 여기에서는 짧은 감상을 적은 것에 그친다.
그는 문필을 업으로 삼는 사람 사이에는 잘 알려있으며, 그의 업적은 곧 나올 『용비어천가』나 『염지봉선화가(染指鳳仙花歌)』에 명확히 드러날 것이다. 그런 만큼 나는 여기에서 그가 자신의 생애에서 획기적인 나이에 죽었다는 것과, 그가 이 시집을 낸 후 10년 정도는 아무 것도 발표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점, 그리고 친한 벗으로서 그를 보낸 후 개탄하는 마음정도를 쓰려고 한다. 비록 그가 10년 동안 아무 것도 쓰지 않겠노라 말했다 하여도, 그는 바로 뛰어난 업적을 내놓았을 것이다. 또한 그가 지금까지의 자신을 뛰어넘어 일생의 업적을 만들어낼 시기에 이르러서 길을 잃어버린 것 마냥 죽은 것을 우리는 무엇보다 애석히 생각한다.
다시 쓰지만 김종한의 장례식에 나도 입회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명확히 다가오지 않아서, 얼마인가 시간이 지나서 그의 죽음을 나는 확실히 인식했다. 그러자 전시(戰時)의 황망한 움직임이 죽은 벗에 대한 회상마저도 휩쓸어 가버릴 것 같았다. 현재 우리는 격렬한 폭풍우 가운데 있기에 “망각의 기념을 위해” 벗에 대해 쓰는 것도 제한된 시간 밖에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 기회에 극히 짧은 회상을 하게 된 것이다.
그가 죽기 이틀 전, 며칠이었나, 경성여자의전(京城女子醫專)의 넓은 병실에서 서정주 씨와 나는 그를 만났다. 우리 셋이서 만나고 있을 때, 그는 이미 죽음의 전조를 보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똑똑히 알고 있었기에, 그가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더욱 애처로웠다. 게다가 죽기 바로 전까지 『내선의 율동(內鮮の律動)』(사토[佐藤] 씨의 시집의 제목을 빌린 것)을 밝게 상상하며 말했던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죄어오는 것 같다. 무릇 시인의 임종과는 어울리지 않는 병실의 딱딱한 침상에서 그는 잠들지 못한 채, 가죽 소파에서 생활했다.
침상 아래에는 그가 신어 닳은 구두가 한 켤레 있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이틀 후 그의 곁으로 왔을 때는 관이 된 그 옆에 산악모자와 같은 것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지난 번 그는 내가 건네 준 괴이한 카라멜 두 개를 먹었고, 우리를 위해서 배를 깎아줬다. 그리고 그와는 영원히 이별했다.
지금 그의 무덤에도 눈이 쌓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가 전 생애(반생에 가깝다)에 걸쳐 남긴 시집을 통해 그를 떠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나와는 인간적으로 달랐고, 시를 쓰는 경향도 같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 내가 중대(中隊)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온 후부터 한 달 정도 사이에 그는 붙임성 있게 나를 대해줬고, 관청에서 외출한 나와 오전 중에는 백석의 시에 나올 법한 지나(支那)의 목욕탕에 몸을 넣었다.
커피가 없기에 여기에서 삼십 분 정도 지내는 것이 현재 누릴 수 있는 위안이라고 말하는 등 그는 약해져 있었다. 그리고 내가 돈을 내지 못하게 했다. 나도 일 엔 정도 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그의 사후, 내가 그에 대해 추상(追想)[이 원고가 아니다]하는 글을 쓰고 있을 때 낯선 커다란 나방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던 적이 있다. 그 원고는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지만 미신적인 구석이 있는 내게는 꽤나 괴이한 기분이 드는 일이었다.
그의 사후, 나는 아직 젊은 그의 부인을 만났다. 대단히 인품이 좋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그에게는 네 살 된 사내아이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의 생애는 결코 불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그 자신이 시인된 기분에서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마음속으로는 그것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경성에서 화장을 하게 돼 (그의 의모[義母]는 함경북도 극동[極洞]으로 옮길 것을 희망했지만) 상경한 부인과 화장터에 함께 가자, 부인은 사람들로부터 멀어져서 뒤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걱정이 돼 그것을 내게 말해준 친구가 뒤를 쫒자, 부인은 붉은 벽돌로 만든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응시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성격은 약했지만 불굴의 정신을 지니고 있던 그의 생애를 떠올리게 하는 상징적인 것을 느꼈다. 우리 주위의 많은 시인이 애석하게 생각하는 동안은 그는 죽지 않을 터였다.
조잡한 감상을 내보내는 것은 괴롭지만 지금은 이 정도 밖에 쓸 수 없다.
그는 어느 날, 프랑시스 잠의 「밤의 노래」와 안데르센의 「그림이 없는 그림책」을 칭찬했다. 그의 중기 작품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조선의 시인 가운데는 홍사용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유치환의 작품 중에 일부를 애독했다.
길의 끝
咸鏡道는 내리는 눈의
노변에 다리를 아무렇게나 뻗고
생각하는 것이 있네 젊은 남자는
멀리서 흘러온 자인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네 젊은 남자는
하고 내가 소지하고 있는 『설백시집(雪白詩集)』의 여백에 그가 자필로 써넣었다. 1943년 섣달 어느 날이라고 서명해 놓은 것이 기념이 됐다.
손수건처럼
조신하길 바라고
손수건처럼
더러워져 돌아오네
이 사행시도 또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축 늘어진 수양버들도 아니면서
그렇게 싸게 나부끼는 것입니까
봄비가 삼월에 내린다고 해서
손가락 끝에 남아있는 분함이 흘러가진 않지요
이것은 그가 『염지봉선화가』의 계획을 내게 알려줬을 때 보여준 것으로 인문사 편전지에 연필로 쓴 것이다.
나는 어느 날, 누구에게 보내려고 한 것도 아닌 추도시를 썼다. 그에게 쓴 것은 아니지만 정신적인 의미로는 동일하기에 여기에 써놓는다.
이 물가를 일찍이
죽은 시인과 걸었노라
그는 이 돌로 된 건널목 위에서 잤노라 말했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우리였다
그런데도 하천을 사랑했다
물이 부족하더라도
그것은 미라보 다리의 노래를
우리가 사랑했기 때문이리라
하천이라고 하기보다 하천바닥이다
과거의 물은 어디로 갔는가 (하천 바닥을 쪼고 있는 까마귀에게 물어라)
효교(孝橋) 장교(長橋) 수표교(水標橋)
다리 이름만 남아
사람이 쓰레기터로 만든 하천을
목욕통 옆의 몸 씻는 곳으로 삼은 이 하천을 과거 그와 함께 걸었노라
「광진(光塵)」
고 김종한
너의 눈동자에는
태양조차 아직 흔들려 정해지지 않고
먼 옛날 푸른 하늘이
그 빛의 줄무늬만이 비추고 있네
우리 눈에조차
형태를 갖추지 못한 봄의 혼돈함에
부모 얼굴을 겨우 알아보는 네가
그 정도로 궁구하는 것은 대체 무엇이냐?
묵도 중에 나타난 이 나라의
그 목숨을 이어
뜬구름처럼 그늘 없이
바다에 이는 파도처럼 멈추는 것을 모른 채
너는 더해지고
아로새겨지고
맞고 권유를 받고
용감한 사냥꾼이 돼
미래를 몰아대겠지
네가 보내는 광진(光塵)이
푸르게 계속 접혀 내게 보여
지금은 새로운 세기의 세상
나라가 태어나는 괴로운 때로 (일본의 국토 창세 이야기와 관련된 신화-역자 주)
네가 맞이하는 날이야말로
노래해야할 만요(萬葉)의 봄이 되리라
네 꿈 알 길 없지만
그 무거움은 너를 안는 내 사지에 전달 돼
이렇게 서있는 나를
내 자식인 네가 성장하는 날에
절실히 아름다운 노래로 불러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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