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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문 안에서/연구와 번역

일본문학자들의 전쟁책임을 묻다 / 오다기리 히데오

by DoorsNwalls 2024. 9. 20.

 

오다기리 히데오(小田切秀雄)

 

중요한 문제이기에 (1946년) 3월 29일, 신일본문학회 도쿄지부 창립대회에서 제안을 해 가결된 회의 요지를 이하 게재한다. 요지 작성에 있어서는 지부 창립준비위원회 제 씨의 협력을 얻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 새로운 문학적 창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혼미・빈곤이 일반적인 상태다. 이는 전쟁 중의 암담한 날들 가운데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억압으로 인해 우리들 창조의 주체 그 자신이 심각하게 고통 받은 실정을 말해 주는 것이다. 새로운 창조에 견딜 수 있기까지는 억압에 의해 왜곡된 우리들 자신의 혼과 육체가 아직 회복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회복하는 것은 용이하게 이뤄지는 일은 아니리라. 우리들이 받은 상흔은 크며 쉽게 아물지 않는 깊이를 통해 육체를 부수고 피를 더럽혔기 때문에. 우리들은 우선 우리들 자신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침묵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침묵이 항상 금(金)일 수 있었는지 어떤지. 수단을 위해서 축 늘어지고 애매한 것을 쓴 경우, 그러한 것이 문학자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이 모든 것을 우리들 자신이 세차게 되돌아보는 것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문학에서의 전쟁책임이란 다른 무엇이라고 하기보다는 우선 우리들 자신의 문제이다. 우리들 자신의 자기비판으로부터 이 문제는 시작된다. 자유로운 세계에서 눈속임은 통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전쟁 중 우리들이 어떠했는지를 스스로 따지고 검토해 비판한다. 그것에 의해 지난 10년 간 일본문학의 지독한 타락・퇴폐에 대해 우리들 자신의 책임을 명확하게 해가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최근의 ‘1억 총참회’를 행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그것은 어이없는 일이다. 주지하는 것처럼, 그것에 따르면 누구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통해 일부 사람들의 중대하며 또한 직접적인 책임은 얼버무려진다. 일본문학이 타락하는 것에 직접적인 책임자・타락으로 이끈 지도자가 없었다는 말인가. 인민의 혼이었어야 할 문학자이면서도 오히려 침략 권략의 메가폰으로 변해서 인민을 전쟁으로 몰고, 기만과 영합 등에 의해서 지배자의 부끄러움도 못 느끼는 몸종[婢女]이 된 자, 특히 그 선두에 선 자들이 없었다는 말인가.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이 특고경찰이나 헌병이나 그 밖의 힘에 의해 침묵 당했을 때 그것을 기회로 삼아서 날아다닌 자, 혹은 자신의 문학상 적을 “적성분자다”라거나 “자유주의자다”라고 말하며 밀고하고 도발해 특고경찰에게 양도한 문학자는 없었다는 말인가. 또한 조잡한 인간주의나 휴머니즘을 통해 이번 전쟁의 본질을 혼동해서, 그것으로 침략전쟁을 인간이나 휴머니티라는 명목으로 요란히 꾸며서 세상의 유연한 마음을 갖은 젊은 사람들을 전쟁으로 내몬 문학자는 없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또한 설령 자연스레 전쟁을 현실의 움직임이라고 어쩔 수 없이 긍정했다고 하더라도, 그 긍정했다는 것이 젊은 문학적 세대가 전쟁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밀어 붙이는데 큰 힘을 쓴 문학자는 없었다는 말인가.
 
 
이 모든 것 가운데 관여한 사람은 있었다. 우리들은 이하에 그 주된 인물의 이름을 열거한다. 본래 문학에서 전쟁책임자는 문단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보국이나 보도부나 그 밖의 군벌 관료 가운데도 출판문화협회나 그 밖의 통제기관 가운데도, 언론계 가운데도, 경찰이나 재판소 가운데도 이들은 있다. 이들은 문학자를 협박하고 유혹하고 회유하고 기만했다. 하지만 문학의 타락에 첫 번째로 책임이 있는 사람은 역시 문학자에 다름 아니다. 우리들이 문학에서의 전쟁책임자를 우선 문단 가운데서 찾아 나열하는 이유이다.
 
기쿠지 칸(菊池寛), 구메 마사오(久米正雄), 나카무라 무라오(中村武羅夫), 다카무라 코타로(高村光太郎), 노구치 요네지로(野口米次郎), 사이조 야소(西條八十), 사이토 류(斎藤瀏), 사이토 모키치(斎藤茂吉), 이와타 토요오(岩田豊雄{獅子文六}), 히노 아시헤(火野葦平), 요코미츠 리이치(横光利一), 가와카미 테쓰타로(河上徹太郎),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가메이
가쓰이치로(亀井勝一郎), 야스다 요주로(保田與重郎), 하야시 후사오(林房雄), 아사노 아키라(浅野晃), 나카가와 요이치(中河興一), 오자키 시로(尾崎士郎), 사토 하루오(佐藤春夫), 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実篤), 도가와 사다오(戸川貞夫),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 후지타 토쿠타로(藤田徳太郎), 야마다 요시오(山田孝雄) (이상 25명)
 
여기서 다룬 것은 주된 책임자뿐으로 그 외는 다음 기회에 다루겠다. 이번은 제1회 발표이다. 여기서는 특히 문학 및 문학자의 반동적 조직화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자, 또한 조직상에서는 그렇지 않더라도 기존에 그 인물이 지닌 문단적인 지위가 중대해서 그 인물이 침략 찬미의 메가폰으로 변하고서도 부끄러이 여기지 않았던 것이 광범위하게 문학자 및 인민에게 심각하고 강력한 영향을 미친 자, 이 두 종류의 문학자에게 중점을 두고 뽑았다.
 
우리들은 이처럼 지명하는 것으로 그들의 책임을 추궁한다. 그리고 문학자가 실로 공직 이외의 아무런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 문학은 개인적인 일을 다루는 실로 그것으로 공적인 것에 깊이 접촉해 가는 것으로, 이른바 공직 그 자체이며, 따라서 이러한 책임자는 문학계로부터 공직파면을 당해야 하는 해당자임을 우리들은 주장한다. 우리들은 그들이 물러설 때까지 그 책임의 추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阿部合成 <見送る人々> 아베 고세 / 환송하는 사람들

 
하지만 문학 방면에서의 전쟁책임은 추궁 명부를 발표하는 것이나 ‘공직 추방’을 통해 끝나는 것이 아님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오히려 앞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손에 의해 전쟁 중에 문학이 어떻게 됐는가 하는 실정을 철저하게 조사하는 것, 문학 관념이나 문예 사상이 어떤 식으로 왜곡됐으며 또한 타락하게 됐는가. 문학적 창조의 원천이 어떠한 절차에 따라 완전히 고갈될 정도로까지 몰렸는가. 이러한 모든 실제적인 모습을 명확히 확인하는 것으로 신문학 창조의 길을 맑게 해서, 토대를 쌓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새로운 문학적 창조의 개화에 의해 전시중 문학의 우열(愚劣)과 비소(卑小) 등을 실제적으로 짓밟아 갈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특히 전쟁 중 휩쓸리거나 혹은 편승해서 감쪽같이 속았던 문학자가 자신의 책임을 통감할 것, 또한 그 통감의 절실함을 앞으로 자신의 창조적인 작업에 살려 가는 것, 그것으로 자신의 책임을 진실로 해결하는 것, 그러한 것에 우리들은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성실한 문학자는 그렇게 많지 않지만 이미 있다. 우리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 우리들은 이러한 문학자에게 기대하며 힘을 합치고 싶다.
 
하지만 침략전쟁의 고통스럽고 아픈 시기를 통해서 문학자의 성실함은 많이 표출됐다. 중대한 전쟁책임을 갖고 있는 문학자는 지금 시치미를 떼고 혹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고, 혹은 사정을 변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상태로 일본문학의 회복은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무릇 비문학적인 방식이 존재하는 한, 그것을 철저하게 추궁하려고 하는 자들이다.


 

오다기리 히데오(小田切秀雄)
1916-2000. 일본을 대표하는 문예비평가, 근대문학 연구자의 한명이다. 1941년부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나 1943년에 전쟁에 소집된다. 1944년에는 마르크스주의문학연구회 활동이 원인이 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다시 체포된다. 일본의 패전 이후 문학자의 전쟁책임을 추구하는 활동을 펼쳤다.


 # 이 글은 모 잡지에 게재했던 내용을 블로그에 맞게 편집한 것임을 밝혀둔다. 다만 최종 게재본이 아니라서 초벌 번역을 약간 손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