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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문 안에서/연구와 번역

아쿠타가와상 작가, 마타요시 에이키의 문학세계

by DoorsNwalls 2024. 9. 20.

작가 스스로가 말하는 자신의 작품 세계!

마타요시 에이키 ( 又吉栄喜 )

 
제8회 규슈예술제문학상을 수상한 「조지가 사살한 멧돼지(ジョージが射殺した猪)」(『文学科界』1978.3)라는 작품을 통해서 제 소설관의 일단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래, 소설 작품이라는 것은 완결돼 있어서, (작가가) 작품을 보족하거나 해설하거나 분석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으며, 또한 올바르지 못한 방법이라고 평소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오키나와라고 하는 작은 섬의 일단이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독자 한 사람’의 입장에서 제 작품을 분석해 보려고 합니다.
 

 
줄거리
베트남전쟁 당시. 무대는 오키나와 미군기지 주변. 마음이 약하고 왜소한 체격의 미군 병사 조지가 주인공. 조지는 동료에게도 흑인 병사에게도 오키나와 여자에게도 매도당한다. 흑인 병사에게서는 폭행을 당하고 전쟁의 의미마저 알 수 없는 상태가 돼, 정신의 균형을 잃는다.
 
조지가 미군기지 밖을 헤매 다니던 어느 날, 살기 위해 ‘미군 지배를 몹시 싫어하면서’ 실탄 군사 연습 후에 나오는 스크랩(불발탄)을 줍는 오키나와 노인을 발견한다. 조지는 이 노인이 눈으로 ‘더러운 아메리카’라고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고 믿어버린다. 끝내 그는 이 노인을 ‘멧돼지’로 스스로 굳게 믿고 사살한다.
 
조지가 태어난 배경
제가 체험한 원풍경이 소설의 바탕이 됐습니다.
베트남전쟁 당시, 제가 살던 집 근처에는 미군 병사가 광폭해져서 민가를 부수거나, 마을 사람들에게 덤벼들거나, 전쟁에 가고 싶지 않다며 울부짖었습니다. 또는, 오키나와인 허니(애인, 정부)에게 화를 내거나, 하루 종일 마을 안을 배회하거나, 흑인병사나 백인병사가 난투를 벌이거나 하는 등의 사건이 일상다반사로 있었습니다.
 
또한 초등학교 2학년 때 동급생인 ‘유미코 사건(由美子ちゃん事件)’(1955.6.30), 초등학교 6년 때는 역시 많은 동급생이 희생이 된 ‘미야모리소학교(宮森小学校) 제트기추락사건’(1959.6.30)이라고 하는 ‘현실’에 강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1950년에서 1960년 전후의 오키나와의 정황과, “멧돼지로 오인해서 노인을 사살했다”(1959.12.26)고 하는 신문기사에 정신이나 감성이 흔들렸습니다. 이러한 것이 강한 모티프가 돼서 ‘조지’라는 인물이 탄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작품을 쓰기 시작하면 작가는 ‘언어가 돈이나 채찍’ 이상의 힘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 후에 작가는 주인공이나 자기 자신의 결점 및 눈을 감고 싶은 ‘현실’을 백일하에 드러낼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조지는 자신의 약함, 우둔함, 비정함(이러한 속성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습니다)을 속속들이 드러냅니다. 또한 조지 자신을 짓누르는 철벽과 같은 ‘현실’도 공표합니다.
 
저는 무엇을 써야할지 알 수 없을 때는, 자신에게 가장 긴박한 현실을 한 마디 한 마디 내면에 각인하듯이 씁니다.
연애에 비유하자면 ‘사랑’이 성취되면 ‘기쁨’을 실연하면 ‘슬픔이나 괴로움’을, 혹은 거꾸로 성취했을 때 ‘슬픔’을 실연했을 때의 ‘기쁨’을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통찰한 인간성이나 인생관에 입각해서 쓰려고 합니다.
실연은 감추고 싶다, 잊고 싶다고 하는 것이 인정(人情)입니다만, 소설이 완결하면 주인공이나 작자가 (독자와 함께) 구원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지도 비정한 행위를 했기에 카타르시스를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소설을 쓰는 의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편견이라고 하든 말든, 지나치게 집착한다고 하든 말든, 주인공은 철저하게 주체적인 인간으로 성립돼야 합니다.
조지도 괴로움이나 문제를 ‘군의’에게 상담했다면 궤도를 수정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겠지요. 하지만, 조지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상태로 ‘자기’ 내부에 딱딱하게 굳어져 있습니다.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라소에 요도레에서 작가의 뒷 모습

조지는 ‘새로운 현실’에 있다
소설은 현실을 카피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현실’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현실’을 확실히 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애매하고 막연한 허실이 뒤섞인 세계를 보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현실’에는 불순물이 많아서 우리들의 사색・통찰・관찰을 흐리게 만듭니다. 소설은 완결된 세계입니다. 좁지만 깊고, 잘 닦여서 맑습니다. 그러므로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무질서하며 이완된 ‘현실’에 질서・긴장・필연성・인과관계・본질을 부여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이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지와 같은 미군 병사가 ‘현실’에서는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새로운 현실’에는 있을 수 있습니다.
돈키호테도 햄릿도 현실의 스페인사람이나 영국사람 같지 않다고 하는데, 조지도 어쩌면 미국인 같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조지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소재, 혹은 자신의 감각(감성)에 깊은 무언가가 포함돼 있다고 하는 예감이나 직감이 있습니다. 그것이 테마가 됩니다. 깊이라고 하는 것은 감동과 그 궤를 같이 하기에 자신이 감동하지 않으면 제아무리 글을 상세히 써도 독자는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작가는 테마를 확실히 파악하고, 플롯이나 등장인물 내부에서부터 인물을 빚어내, 글을 전개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인이었을 무렵, 저는 테마 앞에서 곧잘 다리가 움츠러들었습니다. 테마에 칭칭 묶여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테마를 발견한 후에 쓰는 타입과, 쓰면서 테마를 발견하는 타입이 있습니다. 개략적으로 말하면, 전자는 단편, 후자는 장편을 쓸 경우에 해당되겠지요.
 
조지의 경우는 ‘이국의 작은 섬에 내던져진 나이브한 미군 병사 조지의 운명을 쓰자’고 하는 정도의 테마를 설정했습니다. 미군 병사에게도 피해자의 측면이 있다, 오키나와인에게도 가해자의 측면이 있다고 하는 사상을 처음부터 확고하게 갖고 있던 것은 아닙니다. 소설의 ‘의미’라는 것은 써내려가는 도중에, 작가의 체험이나 감각, 사상이 뒤섞여서 필연적으로 나오게 됩니다. 작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인간성이나 인생의 심연이 갑자기 나타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막 작품을 쓰기 시작한 신인의 경우에 테마를(또 연애를 예로 들자면) ‘실연의 괴로움’을 쓰자, 혹은 ‘실연의 황홀함’을 쓰자는 정도로 크게 설정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키나와 바다에서

 조지는 무엇을 보고 있나?
돈키호테에게는 ‘풍차가 적군’으로 보입니다. 그 정도로 극단적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자신의 안경에 비치는 세계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같은 바다를 보더라도 어부는 어떠한 물고기가 있는지 바로 파악하며, 화가는 어떠한 색이 잘 맞을지 생각하고, 카누 선수는 물결침이나 파도를 주시합니다.
 
작가는 누구에게 ‘세계’를 보도록 하면 테마가 베어 나오게 할 수 있을까? 부각될까? 등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조지가 아니라 흑인 병사를 시점 인물로 삼았다면 작품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을지도 모르지만, 이 소설에서는 조지를 통해서 이야기를 진행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지의 눈에는 오키나와의 산호초 바다도 심오한 문화도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더라도 뭉크의 그림처럼 일그러져 비출 뿐입니다. 그러므로 조지의 시점으로 테마를 표현(현현)하게 되면 쓸데없는 부분이 제외돼, 세계가 또렷해져서 독자에게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조지의 시점에 대해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말했던 평론가가 있었습니다.
 
어째서 조지가 주인공인가?
조지에게는 주체성이 없습니다.
조지는 애인(?) 에밀리에게 편지를 쓰는 모양입니다만, (전화를 하지 않아) 실제 목소리는 듣고 있지 않습니다. 조지에게 에밀리는 가공의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조지는 사람과 직접 접하려고 하지 않는 자폐된 상태입니다.
어째서 조지는 목소리를 발화하지 않는 것일까요? 조지가 목소리를 발해서, 전쟁을 규탄해도 거대한 군사기구 안에서는 의미가 없는 것는 것일까요?
 
조지에게는 친구가 없습니다. 비사교적입니다. 고독하며 고립돼 있습니다. ‘전우’라는 말은 조지에게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조지에게는 미국인도 오키나와인도 남자도 여자도 젊은이도 노인도 (그 안에는 이른바 선량한 사람도 있습니다만) ‘자신을 지옥으로 떨어뜨리는’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설령 선량한 사람이 조지에게 조언을 해도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지의 시야는 굉장히 좁고, (원래는 이성과 철학을 겸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만) 편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신, 목사, 의사 등도 전혀 신용하지 않습니다. 에밀리가 최후의 성채인지도 모릅니다만, 그녀는 조지가 살아가는 세계의 권외에 있습니다.
 
본래 조지는 미국에서는 소박한 농업을 하고 있던 청년이었는지도 모르고, 무언가 이상을 품고 면학에 힘쓰던 청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조지를 이토록 변화시킨 것일까요?
변화시켰다고 말해도 조지는 아직 전장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오키나와에서 미군으로서 근무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실전 체험도 없습니다. 다만 군사훈련은 과격하며, 인명 살상을 정신과 신체에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군대와 밤의 세계가 조지의 모든 것입니다. 전장이나 죽음을 상상하는 공포는 실전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베트남에 가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벗고, 마침내는 오키나와인이 베트남인으로 보입니다.
조지는 전장에 가기 전에 광기에 빠졌습니다. 전장이 아닌데도 광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군대의 무서움입니다.

오키나와 바다에서

 
그러면 조지를 구제할 수 없는 것인가?
 
조지를 구해내는 것이 인정에 맞습니다만, 그 구원자로 신부나 심리 카운슬러를 내세우면 테마가 붕괴합니다. 이 소설은 구원을 하는 플롯이 아니라는 것을 조지 자신이 결정하고 있습니다. 조지 (여기서는 테마라고 바꿔 말해도 좋지만)를 위해 작가도 독자도 비정해질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신부를 내세워도 역시 구할 수 없었던 인물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행동이나 심리를 제어해서는 안 되며, 또한 할 수도 없습니다.
 
강제로 친구나 신부나 의사를 등장시켜서, 조지를 구해내도 어중간한 구원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선문답 같지만, 조지처럼 되지 않는다면 조지를 구해낼 수 있습니다.
반복하지만, 조지가 선인이라든가 악인이라든가 피해자라든가 가해라든가 이런 부분은 작가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결정하게 되면 작가 한 사람의 가치 판단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평론이나 에세이와 마찬가지가 됩니다. 소설은 작가의 사상으로부터가 아니라 주인공의 삶의 방식으로부터 독자가 모든 것을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주인공을 객관시하는 냉철한 눈이 작가에게는 필요합니다. 제가 이 소설을 썼을 때는 오로지 주인공 조지의 눈이 되고, 머리가 돼 ‘소설처럼 만들자’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다짜고짜 썼습니다. 지리멸렬하더라도 주인공이 작품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쓰기 방식을 택했습니다.
 
제게는 작가가 등장인물을 장기의 말처럼 움직여서 우위에 서서, 내려다보는 여유는 없었습니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갑니다만, 군인들은 적잖이 조지처럼 파멸(인간성 상실)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듯이 작가는 조지를 지원할 수 없습니다. 조지의 운명은 작가가 아니라 조지 자신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조지는 (현실 세계에서는 수동적입니다만) 소설적 주체성이 있습니다.
세계문학에는 인간적 매력, 존재감, 위대함, 상징성이 있는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주인공은 현실의 인간을 넘어서 있습니다. 무엇이고 망설임 없이 해치웁니다. 하지만, 언제나 격렬한 초조함 속을 살아가는 히스크리프나, 못생기고 호색한인 저팔계 등과는 친구나 가족이 되고 싶지 않다고 다들 생각할 것입니다. 친구나 가족이 되고 싶지 않은 주인공은 세계문학에도 꽤 많이 있습니다.
 
조지처럼은 되고 싶지 않다고 독자는 생각하겠지요.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독자 자신이 생각합니다. 그 지점에서 작품의 의미가 산출됩니다.

오키나와 바다에서

조지는 어떻게 움직였나?
미군 병사의 생태, 멧돼지 사건은 저와 직접 관계는 없었습니다만, 어느새 조지가 눈사람처럼 부풀어서, 가까이 다가와 저는 붙잡혀 도망칠 수 없게 됐습니다.
작가는 조지를 “어떻게 될까?” “어떻게 해야 할까?” 등으로 생각하지 않고, 조지의 눈에 비추는 풍경, 조지의 몸에 닥쳐오는 사건을 성실히 기술하게 되었습니다.
조지는 파멸로의 길로 돌진해 갑니다만, 작가는 조지가 영향을 받는 무언가, 영향을 미치는 무언가를 ‘깊이’ 쓸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조지의 최후(결말)에는 작가도 입회해야만 합니다. 이러쿵저러쿵 말해도 조지를 만들어낸 자로서의 책임입니다.
조지가 노인을 사살하는 필연성이 있는가 하는 문제가 마지막에 작가에게 닥쳐옵니다.
 
필연성이 있다면 작가는 무엇을 써도 상관이 없습니다. ‘카프카의 주인공은 벌레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나카지마 아쓰시(中島敦)의 주인공은 호랑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지는 사살할 수밖에 없었다’고 독자가 마음속으로 납득한다면 소설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지의 고동
어느 소설가가 “「조지가 사살한 멧돼지」의 문체는 연발총과 같다”고 말했습니다만, 문체는 주인공과 혼연일체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지의 고동과 같은 리듬. 군대의 타악기와 같은 리듬. 파멸을 향한 행진과 같은 리듬. 조지는 심장이 경종을 울려대는 것처럼 상식이나 이성을 흩뜨리고, 열광한 채로 운명의 심연으로 나아갑니다.
 
조지의 내적고백
조지는 내적고백(모놀로그)을 합니다. 마음이 누구와도 통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에 응축된 조지를 바짝 추적하기 위해서 모놀로그 형식이 필요했습니다. 만약, 조지가 제대로 자신의 목소리를 발화하고, 주변 사람에게 자신에 대해 말하면(객관화 가능했다면) 조지는 구원됐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군대 기구 안에서 ‘개인의 목소리’는 완전히 봉쇄돼 있습니다. 자기주장, 자기표현 등을 할 수 없습니다.
 
목소리를 잃는 것은 군대 안에서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 가운에서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보신을 위해서, 겁이 많아서) 말로 하지 못하고, 본심을 봉인하고, 사람을 파멸로 내모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지의 운명은 보통 사람의 운명과 겹쳐집니다.
 
그런데 이 소설의 표현 방법에 대해서 말해보려 합니다. 저는 소설이 지나치게 정돈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피카소의 인물상은 눈은 앞을 보고 있지만, 입은 뒤에 있습니다. 세잔의 사과 그림도 실제라면 그 사과는 테이블로부터 반드시 굴러 떨어질 것입니다. 방법에 대한 의식이 상식을 능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설은 균형을 생각하지 말고 철저하게 써야만 합니다.
냉철하게, 하지만 열광적으로 써야 합니다. 상반된 것이지만, 창작을 할 때 이것은 빼놓을 수 없는 자질입니다.
문체도 스토리도(현실에는 없는 것처럼) 독창적으로 만들어, 독자에게 일종의 마법을 걸어서, 독자가 제 정신으로 돌아가는 말은 한 줄도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키나와 시사

 
조지의 눈에 비친 멧돼지는?
세상에서 구원을 바라지 않는 인간은 없습니다. 조지도 (잠재적이기는 하지만) 구원을 받고 싶어서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성(인간성)을 잃어버립니다. 그는 노인을 사살하고, 카타르시스를 얻습니다. 그것이 조지에게 구원이 돼버렸습니다.
가해자(예를 들어, 군대 친구)를 사살하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이 방법을 쓰면 ‘앙갚음’이라고 하는 현실적인 모티프가 됩니다. 현실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조지(가해자)가 피해자(전쟁피해. 고령이라는 시간에 의한 피해. 빈곤이라고 하는 사회적 피해) 노인을 사살하는 것으로 작품에는 의미가 감돌게 됩니다. 중층성을 갖게 되며, 가해자가 아닌 독자도 무언가에 촉발돼 새로운 체험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키나와인은 (미국인에게)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가? 조지는 멧돼지로 보고 있습니다. 멧돼지는 저돌적이고 맹진하며, 정직하고, 유머러스합니다. 또한, 소박하고, 단순명쾌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멧돼지’는 사자 등의 맹수가 아니며, 조지에게 가해를 가하지도 않습니다. 조지에게 ‘멧돼지’로 여겨져 사살될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조지가 사나운 군인을 사살했다면 독자도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얻었을지도 모릅니다만(보복과도 같은), 그 경우에는 다른 의미가 산출됩니다. 약한 자의 창끝은 보다 약한 자에게로 향해진다(인간의 성정?)고 하는 것이 이 소설에서는 철저하게 강조돼 있습니다.
 
제목에서부터 보자면 멧돼지가 강조돼 있습니다. 멧돼지가 조지라는 존재를 색출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신문기사, 사실에서는) “멧돼지로 오인해서 노인을 사살했다”고 했습니다만, 이와는 달리 이 작품에서 조지는 노인을 멧돼지라고 정하고,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은 채 사살했습니다.
 
조지가 사살한 상대는 멧돼지가 아니면 안 됩니다. 소, 말, 닭, 여우, 너구리여서는 안 됩니다.
「조지가 사살한 너구리」라는 제목으로는 무언가 잘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무엇이 어떻다 하기보다, 이것은 작가의 직감입니다만, 멧돼지는 오키나와(사람)의 무언가를 부호처럼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지에게 ‘멧돼지’로 판정된 노인 자신은 (미군의 사건사고의 희생자가 된 오키나와인과 마찬가지로) 어째서 자신이 살해당해야만 하는 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조지에게 한마디로 했다면 노인은 죽지 않고 무사히 살아서 돌아갈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적(미군기지, 군대)에는 항의의 목소리를 발하라고 하는 메시지로도 받아들여집니다.
(기지경제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군고용원이나 A사인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군사연습에서 나오는 스크랩을 주워서, 어떻게든 생활을 해나가는 노인은 말이 없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입 밖으로는 내지 않지만, 노인의 눈은 미군을 반대하는 빛을 띄우고 있습니다.
 
이 눈을 본 조지의 눈에는 ‘약자’인 노인조차 가해자로 보였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자기보다 완전히 약하다고 믿고 있던 사람이 자신을 정면에서부터 노려보고 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자신이 가장 약한 존재가 돼,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멧돼지’가 자신에게 돌진해오는 무서운 존재로 보여, 방아쇠를 당겼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조지는 전혀 모르는 타인을 사살해서 카타르시스를 얻습니다. 조지의 광기를 만든 국가라든가 거대한 군사기구라든가 군인 등에 공격의 칼날을 향하지 않고, 검소한 일상에서 목숨을 힘껏 이어가고 있는 (오키나와) 노인을 죽이는 것은 실로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오키나와 시사

 
조지와 작가
독자도 역시, 어째서 조지는 군인 동료나 가해자를 죽이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오키나와에서 태어난 작가가 ‘자기 자신의 문제’로 삼아, 미국인이 미국인을 죽이는 의미 이상의 의미를 (오키나와 사람들 가운데서) 발견해 내려고 했던 것일까요.
“했던 것일까요” 라고 이 작가는 타인의 일처럼 말하고 있습니다만, “어째서 나를 살인자로 만드나”라고 하는 조지의 불평을 들었을 때, “너는 그런 일을 해서 그런 성격이니까” 하고 당당히 대답해야만 합니다. 작가는 주인공을 어떠한 사건에 직면시켜도 됩니다만, 모든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군대의 본질 가운데 조지가 사람을 사살한 것은 작은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조지가 이러한 사건을 일으켜도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군대는 존속합니다. 하지만, 조지라고 하는 '인간'이 독자 마음속에 확실히 남아있다면 무언가가 현실적으로 움직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독서 후, 평소와 같은 세계(현실)가 묘하게 변용해서, ‘이러한 세계(현실)이 지반에 있다면 무언가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독자의 마음이 흔들렸다고 한다면, 작품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상은 작가 개인의 작품 읽기였습니다. 이것과는 전혀 다른 독해 방식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하게 읽힌다고 하는 것은 작가의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이 표현된 증거이기 때문에 작가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감사한 일입니다.
조지를 통해서 ‘현실’을 조리있게 설명하려 했습니다만, 그것이 또한 번잡함을 더했다는 느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 이 글은 모 잡지에 게재했던 내용을 블로그에 맞게 편집한 것임을 밝혀둔다. 다만 최종 게재본이 아니라서 초벌 번역을 약간 손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