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답사의 목적지는 일본군 해군사령부 참호다. 나하 국제공항에서 20여분 정도면 차로 도착할 수 있어 찾기 쉬운 곳이다.
이곳은 1944년 일본 해군이 판 사령부 갱도로 당시에는 450m였다고 전해진다구멍을 콘크리트와 말뚝으로 단단히 다져 미군의 함포 사격에 견디고 지구전을 계속하기 위한 지하 진지로 4000명의 병사를 수용했다. 전후 한동안 방치되었으나 여러 차례에 걸친 유골 수집 후, 1970년에 사령관실을 중심으로 300m가 복원되었다.
답사지로 이곳을 고른 이유는 일본군의 사령부 참호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지하 깊숙이 들어가는 좁은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데, 이런 구조는 폐쇄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 또한 좁고 어두운 공간에 다소 불편함을 느꼈지만, 그 덕분에 한여름의 무더위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위안이 되었다.
이 좁고 어두운 참호 안에서 당시의 병사들이 먹고 자며 전쟁을 치르다 죽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하의 깊은 곳에서 맞닥뜨린 전쟁의 흔적들은 참혹함과 두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사실을 떠올리니 감정이 복잡해졌다.
참호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서 나는 조금 망설였다. 현재 위치는 입구에서 약 12.5미터 떨어진 곳이었는데, 공기가 서늘해졌다. 기온이 낮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이곳의 역사적인 무게 때문에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곳에서는 언제나 마음이 서늘해지는 법이다.
참호 안을 계속해서 더 깊이 내려갔다. 장교들의 막료실이 나오기 전까지 참호는 좁고 어두운 통로가 이어졌고, 그곳에서 마주한 각 공간들은 당시에 사용되었던 시설들이 그대로 복원되어 있었다. 장교들의 회의실, 발전기 설치 장소 등 다양한 공간들이 당시의 전쟁 준비와 전략 회의가 얼마나 철저하게 이루어졌는지 실감케 했다. 사병들은 드나들지 못했을 막료실을 지나가며, 이곳에서 어떤 대화와 전략들이 오갔을지 잠시 상상해 보기도 했다.
나는 참호 내부에서 약 1시간을 머물렀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갑자기 세상이 밝고 평화롭게 느껴졌다. 물론, 지금의 오키나와가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곳에서 사람들은 즉각적인 전쟁의 위험에 처해 있지는 않다. 그 생각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현재가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껴졌다.
일본군 해군 사령부 참호에 설명은 없지만 이곳에서도 수 많은 전쟁 동원이 이뤄졌을 것이다.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그들의 비극적인 삶을 생각하며 나하 시내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실었다.
아열대 기후의 오키나와를 자주 방문하면서 여름은 피하고 싶었는데, 이번 답사는 한여름에 하게 됐다.
덥고 습한 상황에서 계속 걷다 보니 땀이 줄줄 흘러내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때의 경험을 교훈 삼아서 오키나와 방문은 가급적 한국의 겨울에 하고 있다.
1월이나 2월에 오키나와에 가면 한겨울 추위를 피해 봄 날씨로 갈 수 있어서 상쾌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도시의 문 안에서 > 기억과 장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미카제 특공대, 치란 특공평화회관 방문기 (0) | 2024.10.10 |
---|---|
제주4·3유적지 답사-관음사, 사라봉, 목시물굴, 백조일손 (0) | 2024.09.28 |
오키나와문학의 원풍경 거북바위, 가미지 (0) | 2024.09.16 |
히메유리평화기념자료관, 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 / 오키나와 (0) | 2024.09.12 |
중산릉 및 난징대학살 기념관 / 난징 (0) | 2024.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