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에는 지금까지 열 번 넘게 다녀왔는데 가장 많이 방문한 곳 중의 하나가 히메유리평화기념자료관과 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이다.
나하국제공항에서 내려 렌트카를 빌린 후 이동하면 3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오키나와 최남단 곶인 캰CAPE KYAN과도 그리 멀지 않다.
공항에서 무엇으로 이동을 하든 히메유리탑이 있는 히메유리기념관을 지나게 된다.
히메유리는 오키나와전쟁 때 징집된 소녀들을 뜻하는 명칭인데, 원래 뜻은 백합 꽃이다.
전쟁에 꽃이름으로 부대 이름을 짓다니 모순이다.
오키나와전에서 숨진 히메유리 학도대의 넋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 '히메유리탑'. 히메유리 학도대란 태평양전쟁 말기, 간호 요원으로 오키나와육군병원에 동원된 오키나와사범학교 여자부와 오키나와현립제일고등여학교의 학생, 인솔 교사 등 240명을 이르는 말이다. 미군의 침공으로 5월 말에는 오키나와 본섬 남부로 후퇴, 6월에는 갑작스러운 해산 명령이 내려졌고 1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1989년에는 히메유리 학도대의 전쟁 체험을 알리기 위해 병설 자료관이 설립됐다. 자료관에는 히메유리 학도대의 유품 및 사진, 이하라 제3외과호 내부를 재현한 디오라마 등이 전시되어 있어 히메유리 학도대의 체험을 통해 전쟁과 평화에 대해 배우고 생각해볼 수 있다. -위키피디아
기념관 안에는 헌장비와 희생된 여학생의 이름이 새겨진 탑이 있다.
오키나와전쟁에 동원된 학도병들의 죽음은 1945년 3월에서 5월 사이에 집중돼 있다.
불과 두 달만에 생과 사가 갈렸다고도 할 수 있다.
히메유리기념관을 나와서 렌트카를 타고 10분 쯤 가면 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이 나온다.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복귀'한 이후인 1975년에 세워졌으며 수 십 만 평 규모의 시설이라 다 돌아보려면 하루 종일이 걸릴 수도 있다.
기념관 문을 지나면 자료관이 있는데 전시를 보는데 1시간 넘게 걸릴 정도로 자료가 충실하다. 90년대 말에 전시된 일본군 병사의 총끝을 오키나와인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돌려놓는 등의 정치적인 개입이 있어서 난리가 났던 곳이기도 하다.
오키나와전쟁에 휩쓸려 살해된 사람의 이름이 마을과 국적 별로 각명돼 있다. 특이한 것은 희생자 측만이 아니라 가해자 측의 이름도 각인돼 있다는 점이다.
이곳에서 어쩌면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평화의 초석'이다. 다시는 전쟁을 되풀이하지말자는 염원을 담은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기념관 입구 쪽에서 위로 올라가면 한국인위령탑이 있다.
한국의 산소모양으로 돌을 쌓아서 오키나와전쟁에서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오키나와 곳곳에 이런 위렵탑이 있는데 어떤 것은 한국인, 어떤 것은 조선인을 앞에 내세운다. 분단의 상흔은 추모와 위령에도 작동하고 있다.
오키나와를 돌아다니다 보면 가마(동굴)와 사탕수수밭을 자주 본다. 둘 다 오키나와인들에게는 오키나와전쟁을 상기하는 장소라 할 수 있다. 가마는 피난과 자결의 장소, 사탕수수밭은 피난과 폭격을 상기시키는 곳이다.
렌트카를 돌려 나하 시내로 돌아가는 길에 사탕수수밭과 마주한다.
외장하드를 한국에 놓고와서 보여줄 수는 없지만, 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은 오키나와전쟁만이 아니라 2차세계대전 전체의 기념비와 위령탑이 있다.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외장하드를 가져오면 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 2차 포스팅을 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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