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남만주철도 답사 때 대련을 방문했다. 대련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안중근 의사의 목숨을 앗아간 '여순감옥'이다. 그에 관해서는 지난 번에 포스팅을 했으니 건너 뛴다.
여순감옥을 나온 후, 우리 일행은 러일전쟁 당시 난공불락의 고지로 여겨졌던 203고지로 향했다. 여순감옥에서 203고지까지는 7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택시를 타고 약 20분 정도 가니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은 일본 제3군 사령관이었던 노기 마레스케가 자신의 병사들과 함께 러시아군의 견고한 방어를 뚫고 승리를 거둔 곳이다. 하지만 무리한 돌격 작전으로 수 많은 일본 육군 전사자를 내면서 상처 가득한 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203고지는 러일전쟁의 승패를 가른 중요한 전투의 현장으로, 일본군이 이곳을 점령함으로써 러시아의 발틱 함대에 치명타를 입혔다. 전투 당시 일본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냈지만, 끝내 고지를 점령해 전쟁의 흐름을 바꿨다. 오늘날 203고지에는 전쟁의 흔적을 기리는 기념비와 전망대가 있으며, 방문자들은 이곳에서 대련항을 비롯한 대련 시내의 아름다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노기 마레스케는 203고지 전투의 지휘관이었으며, 이 전투로 인해 그의 이름은 일본 역사에 깊이 새겨졌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승리는 노기에게도 큰 상처를 남겼다. 203고지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병사들의 희생이 있었고, 그의 두 아들 역시 이 전쟁에서 전사했다. 특히 큰 아들 노기 호텐은 203고지 전투 도중 전사해, 노기에게는 견딜 수 없는 슬픔을 안겨주었다.
전쟁이 끝난 후, 노기는 자신이 지휘한 부하들과 두 아들의 죽음에 대해 깊은 자책감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죄책감은 그가 이후 일본의 메이지 덴노가 서거하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으로도 작용했다.
메이지 덴노의 장례식 날, 노기는 자신의 부인과 함께 할복해 목숨을 끊었다. 말 그대로 순사(殉死)였는데, 죽음을 각오하지 못 한 아내까지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함께 저 세상으로 데려가면서 그 파장은 꽤 오래 지속됐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과 모리 오가이의 <아베 일족>은 노기의 죽음과 관련된 작품이다.
지금은 평화롭기만 한 203 고지에 서서 당시의 격렬했던 전투를 상상해 보니, 이곳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더 실감할 수 있었다. 오늘날 이곳은 평화롭게 보이지만, 한때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으며, 이곳에서의 싸움으로 러일전쟁의 승패가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후 한반도의 운명이 어떻게 됐는지를 생각해 보면,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은 장소라고 해도 좋다. 여순감옥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203고지는 지척에 있는 곳이니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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