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겨울 일본 근대문학 답사의 일환으로 규슈에서 홋카이도까지 일본을 횡단하고 왔다. 시간순으로 쓰면 좋겠지만 카테고리별로 정리한다.
♣ 오카야마에서 마쓰야마로
오카야마에서 마쓰야마로 가는 요산선을 타고 떠난 이번 여행은 3시간 반 동안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다. 오카야마 역에서 출발한 요산선 열차는 시코쿠의 산과 바다를 따라 달리며 지역 고유의 풍경을 보여주는 느릿한 여정이었다. 열차에 올라타자마자 바로 느낀 것은 열차가 주는 묘한 덜컹거림이었다.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 자주 타던 매끄럽고 빠른 신칸센과는 달리, 요산선의 열차는 오래된 느낌의 좌석과 창문, 그리고 그 속에서 들리는 규칙적인 덜컹거림이 동반되어 과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을 주었다. 조금 지나면서 그 덜컹거림이 점점 더 몸에 와 닿았고, 잠시 멀미가 날 듯한 기분도 들어서 더욱 긴장하게 되었다. 불편함 속에서도 시코쿠 주민들이 오랫동안 신칸센의 도입을 기다리고 있는 이유를 직접 체감할 수 있었다.
열차는 여전히 느린 속도로 달리며 도착까지의 거리를 하나씩 좁혀갔고, 한참을 지나서 마침내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열차가 세토나이카이를 건널 때는 기타비산세토대교 위를 지나가게 되는데, 이곳에서 바라본 풍경은 이 여정의 백미였다. 끝없이 펼쳐진 세토나이카이의 푸른 물결과 그 사이사이 떠 있는 작은 섬들이 하나의 그림처럼 창밖으로 펼쳐졌다. 다리 아래로 깊고 투명한 바다가 일렁이며 다리의 그림자를 잔잔하게 반사하고 있었다.
세토나이카이를 가로지르는 열차의 덜컹거림도 이때 만큼은 낭만적인 흔들림처럼 느껴졌다. 섬과 바다가 어우러진 세토나이카이의 경치는 열차의 느릿한 속도 덕분에 차분히 감상할 수 있었다.
열차는 다리를 지나 한적한 시골 풍경 속으로 서서히 들어갔다. 시코쿠의 작은 마을과 산을 지나며 주변의 자연을 찬찬히 둘러보니, 신칸센과는 또 다른 매력이 느껴졌다. 시코쿠의 푸른 산과 드넓은 들판, 그리고 그 사이사이의 작고 아담한 마을들은 요산선이 아니면 볼 수 없었을 풍경들이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이 여정이 만들어 준 특별함이 더욱 진하게 다가왔고, 마쓰야마에 가까워질수록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덜컹거림 속에서도 잔잔히 이어지는 바다와 산의 풍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이동한 이번 여행은 신칸센이 아닌 느린 열차가 주는 매력과 여유를 깨닫게 해 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 마쓰야마에서
마쓰야마역에 도착하자마자 창밖으로 보이던 풍경과는 또 다른 느낌이 밀려왔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도시의 첫인상이었는데, 역 앞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문인 마사오카 시키의 시비였다.
일본 근대 하이쿠를 대표하는 시인인 마사오카 시키는 이곳 마쓰야마 출신으로, 그의 작품을 기리는 시비가 마쓰야마역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요하게 서 있는 시비에 새겨진 그의 구절을 찬찬히 바라보며 트램역으로 향했다.
그곳을 지나 조금 더 걸으니 "평화 인권존중 기념비"가 역의 한편에 세워져 있었다. 작고 아담하지만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지는 이 기념비는, 평화를 기원하고 인권을 존중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역 앞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매일 그 의미를 일깨우듯 서 있는 이 기념비는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마쓰야마 주민들에게 소중한 상징처럼 보였다. 마쓰야마는 평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도시임을 실감하며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곧이어 호텔로 향하는 트램에 탑승했다. 마쓰야마의 트램은 아기자기한 디자인이 인상적이었고, 속도가 느리지만 도시 구석구석을 둘러볼 수 있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어쩐지 가던 길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밖의 풍경이 익숙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낯설게 느껴졌고, 목적지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트램 방향을 잘못 봐서 역방향으로 타버린 것이다.
잠시 당황했지만, 곧바로 다음 역에서 내려 방향을 바꾸어 다시 트램에 올랐다.
♣ 마쓰야마성에서
마쓰야마성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기 전, 꼭 들르고 싶었던 곳이 하나 있었다. 바로 마쓰야마 명물로 알려진 도미정식을 맛볼 수 있는 맛집, ‘간스이’였다. 마쓰야마를 방문했다면 이 도미정식을 놓칠 수 없다는 말에 기대감을 한껏 품고 찾아갔는데, 간스이의 도미정식은 가격이 2000엔이 훌쩍 넘었지만, 한 입 맛보자마자 1엔도 아깝지 않다고 느낄 만큼 일품이었다. 도미의 풍미가 진하게 우러난 국물과 살이 부드럽게 녹아드는 도미회, 그리고 함께 나온 밥과 반찬들까지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마음 깊이 새길 만큼 인상적인 한 끼였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나서 마쓰야마성으로 향했다. 마쓰야마성은 일본의 주요 성 중 하나로, 평원의 언덕 위에 자리해 있었는데, 성까지 오르는 길에서는 마쓰야마 시내와 성곽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쓰야마성으로 오르기 위해 로프웨이 케이블에 올랐다. 언덕 위에 위치한 마쓰야마성까지 오르는 길은 꽤 가파르고 길었기에 로프웨이를 선택한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케이블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마자, 차창 너머로 펼쳐지는 마쓰야마 시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건물들이 점점 작아지며 시야가 넓어지니 마쓰야마의 풍경이 확 트여 보였고, 멀리서 바다까지 희미하게 보였다.
로프웨이는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했다. 푸른 나무와 울창한 숲 사이로 길게 뻗은 로프웨이 선이 이어져 있고, 그 너머에 자리한 마쓰야마성의 천수각이 점점 가까워지며 고대의 성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가는 기분이 들었다. 천천히 올라가는 동안 바람이 불어와 상쾌했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차분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성에 다가가는 여정을 즐길 수 있었다.
이 성은 1602년 가토 요시아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세운 공적으로 20만석의 영지를 받아 축성을 시작한 것인데, 그가 꿈꿨던 성의 위용이 지금도 느껴졌다. 요시아키는 당시 마사키성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껴 마쓰야마평야 한가운데에 새로운 성을 세우기로 했고, 이후 가모 다다토모가 축성을 완성했다. 그렇게 수십 년간 축성된 마쓰야마성은 14대를 거쳐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내려왔다고 하니 그 역사와 웅장함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마쓰야마성은 현존하는 12개 천수각 중 하나로 일본 100대 명성에도 이름을 올린 만큼, 아름다운 모습과 잘 보존된 구조로 보는 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성에서 내려다본 마쓰야마 시내는 평화로우면서도 활기차 보였고, 그 역사의 한가운데 서서 오랜 시간을 거슬러온 성의 위엄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성 탐방을 마친 뒤에는 성위 상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먹었다.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입안에서 녹아내리며, 성을 둘러보며 느꼈던 감동이 여운으로 남아 온몸에 퍼졌다. 멀리서 바라보이는 마쓰야마 시내는 고즈넉하면서도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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