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겨울 일본 근대문학 답사의 일환으로 규슈에서 홋카이도까지 일본을 횡단하고 왔다. 시간순으로 쓰면 좋겠지만 카테고리별로 정리한다.
♣ 아키타에서 하코다테로
아키타에서 하코다테로 이동한 여행은 처음부터 설렘으로 가득했다. 신칸센 그린칸에 몸을 맡기고 눈 덮인 풍경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신칸센 그린칸은 조용하고 좌석 간격도 넉넉해서 이동하는 동안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 눈이 그쳐 이동이 한결 수월했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푸른 산과 하얀 눈이 섞인 풍경 덕분에 기차 여행의 매력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신하코다테역에 도착하니 주변이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가까운 도요코인 호텔에 도착했을 때, 첫눈에 아늑한 느낌을 받았다. 신하코다테역과 가까워 이동이 편리했고, 하코다테에서의 첫날을 이곳에서 시작하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도요코인에 도착했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늦게 도착하는 숙박객들을 위해 준비된 따뜻한 카레와 밥이었다. 여러 번 도요코인에 묵어 보았지만, 저녁을 제공하는 곳은 처음이라 놀라웠다. 홋카이도의 유명한 카레라 그런지 깊고 진한 맛이 일품이었고, 특히 추운 날씨 속 긴 여정을 마치고 맛보는 따뜻한 카레는 그야말로 만족스러웠다. 다만 카레 양이 조금 부족하게 느껴져서, 아쉬운 마음에 신하코다테역 앞의 매점에 들러보기로 했다.
매점에서 하코다테 컵라면과 오타루 맥주가 눈에 띄었다. 두 가지 모두 홋카이도의 특산품이라 현지의 맛을 한 번 즐겨 보고 싶었다. 호텔로 돌아와 컵라면과 오타루 맥주로 부족한 배를 채우며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맥주의 깊은 향과 컵라면의 구수한 맛이 의외로 잘 어우러져 늦은 저녁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키타에서 시작된 여정과 하코다테에서의 첫날 밤, 그리고 도요코인의 따뜻한 환대까지. 모든 것이 눈 덮인 하코다테의 겨울 풍경과 잘 어우러진 시간이었다.
♣ 하코다테시 문학관, 북망민족자료관, 공회당
신하코다테에서 열차를 타고 하코다테로 이동한 후, 트램을 이용해 홋카이도 개척의 첫 발자취를 남긴 기념 장소로 향했다.
이곳은 ‘開道百年’을 기념하여 홋카이도의 개척을 위해 나아간 선조들의 발자취를 기리는 장소였다. 하지만 이 개척은 홋카이도 원주민인 아이누 민족에게 있어 수탈의 상징이기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며, 역사란 늘 양면적인 해석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됐다.
그 다음으로 찾은 곳은 하코다테시 문학관이었다. 이곳에서는 일본의 저항 문학을 대표하는 고바야시 다키지와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와 관련된 전시가 특히 인상 깊었다. 두 인물의 삶과 작품을 통해 그들이 남긴 사회적 메시지와 시대적 상황이 생생히 다가왔고, 이 문학관에서 당시 일본 사회가 경험한 격동의 역사와 문학의 연관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문학관을 나온 후엔 북방민족자료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서는 홋카이도, 즉 옛 에조치의 원주민인 아이누 민족의 전통문화와 함께, 외부 세력과의 긴장과 싸움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의 북방 개척이 아이누에게 가져온 상처와 투쟁의 기록이 전시된 자료들을 보며, 일본이 타민족의 문화를 억압하고 점령했던 과정이 떠올라 감정이 복잡해졌다. 한국인으로서, 일제 강점기의 식민지 경험이 겹쳐 보였고 자연스럽게 피해자인 아이누의 입장에 감정이입이 됐다.
그 후 하코다테 구 공회당을 방문했다. 구 공회당은 모토마치 지역에 위치한 역사적 건축물로, 1907년 화재로 소실된 마을 집회소를 대신하기 위해 지역 유지의 기부금으로 1910년에 완공된 곳이다.
영국 고전 건축 양식을 바탕으로 한 2층 건물은 푸른색 외벽과 노란색 창틀, 기둥의 조화로 화려하면서도 기품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 건물은 1911년 다이쇼 일왕이 방문했을 당시 그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1974년에는 일본의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공회당을 구경한 뒤 조금 아래로 내려가니 페리 광장이 나왔다. 이곳에는 페리 제독 내항을 기념하는 비석도 세워져 있었다. 과거 오키나와에서 봤던 페리의 흔적을 홋카이도에서도 마주하니 기분이 묘했다. 일본의 개항은 미국의 실력 행사인 ‘포함 외교’에서 비롯되었고, 이를 기리는 기념물이 일본 곳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개항 이후 일본이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이루며 경제적 번영을 누렸기에 페리는 긍정적인 인물로 기려지는 듯했다. 하지만, 만약 개항 이후 일본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었다면 페리는 아마 침략의 상징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 성 요하네 교회로
성 요하네 교회는 하코다테에서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성공회 교회다. 이곳은 1874년에 하코다테에 온 영국인 신부가 창건한 곳으로, 오래된 역사를 자랑한다. 현재 건물은 1979년에 지어진 것이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창건 당시의 전통과 영국 성공회의 고풍스러운 느낌이 남아 있다.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십자형 지붕이었다. 이 지붕은 교회 외관에 독특한 매력을 더해주었고, 전통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냈다. 십자형 지붕 아래에서 예배당에 들어서니, 내면이 차분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담하면서도 경건한 분위기의 내부는 단순하지만 깊이 있는 인상을 주었고, 예배 공간에서 느껴지는 고요함이 마음에 평화를 안겨 주었다.
교회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이곳이 단순히 건축물로서만이 아니라 신앙과 전통이 스며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세기 후반 하코다테에 도착한 영국인 신부가 이 땅에 세운 교회가 지금까지도 지역사회와 관광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공간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이곳의 역사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다.
♣ 하코다네 전망대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다
하코다테에서의 하루를 마무리하며, 일본의 3대 야경 중 하나로 꼽히는 하코다테산 전망대에 올랐다. 일본에는 이처럼 유명한 야경 명소가 세 곳이 있는데, 바로 홋카이도의 하코다테산, 나가사키의 이나사산, 그리고 고베의 마야산 키쿠세이다이다. 고베의 야경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나가사키와 하코다테 두 곳을 다녀본 경험에 비춰보면, 하코다테의 야경은 한층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하코다테의 야경은 그야말로 매혹적이었다. 바다를 끼고 형성된 도시가 반짝이는 불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 빛들은 파도처럼 부드럽게 도시와 해안을 따라 흘러내려가며 그림 같은 풍경을 그려냈다. 도시 중심부에서 해안선까지 이어진 불빛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하나의 커다란 캔버스를 보는 듯했다. 나가사키의 야경도 아름다웠지만, 하코다테의 야경은 훨씬 더 깊고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전망대에서 야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오늘 하루 하코다테에서 경험한 모든 순간들이 이 풍경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는 듯했다. 눈앞의 빛나는 도시를 배경으로 서 있는 이 시간이, 하코다테에서의 하루를 아름답게 마무리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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