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넓궤를 처음 안 것은 영화 <<지슬>>을 본 후다.
영화에서 주민들이 토벌대를 피해서 큰 동굴 같은 곳에 숨어지낸 곳이 바로 큰넓궤다.
동광리 큰넓궤는 1948년 11월 중순 마을이 초토화 된 이후 동광 주민들이 2개월 가량 집단적으로 은신생활을 했던 곳이다. 당시 이 굴에는 120여 명이 숨어 살았다. 1949년 초 주민들은 토벌대의 집요한 추적 끝에 발각되고 말았다. 곧 토벌대는 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청년들은 노인과 어린아이들을 굴 안으로 대피시킨 후 이불 등 솜들을 전부 모아 고춧가루와 함께 쌓아 놓고 불을 붙인 후 키를 이용하여 매운 연기가 밖으로 나가도록 열심히 부쳤다. 토벌대는 굴속에서 나오는 매운 연기 때문에 굴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총만 난사했다. 그러다 토벌대는 밤이 되자 굴 입구에 돌을 쌓아 놓고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게 막은 다음 철수했다. 토벌대가 간 후 근처에 숨어 있던 청년들이 나타나 굴 입구에 쌓여 있는 돌을 치우고 주민들을 밖으로 나오게 했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다른 곳으로 피하도록 했다.
굴이 토벌대에 발각된 후 주민들은 한라산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러나 영실 부근 볼레오름 지경에서 토벌대에 총살되거나 잡혀서 서귀포로 이송됐다. 그 후 이들 중 40여 명이 정방폭포 부근에서 학살됐다.
/ 큰넓궤 - (사)제주다크투어 (jejudarktours.org) 출처 : 4·3 연구소, <4·3 장정 3> , 4·3 평화재단 <제주 4·3 아카이브>
이 설명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이 동굴에 120여명이 숨어 지냈다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동굴이 넓다 해도 120여명이 어떻게 2달을 버틸 수 있었을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제주 지인의 안내를 받아 큰넓궤를 찾아갔는데, 우선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입구가 그렇게 크지 않은데다 높이가 있어서다.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은 알았지만,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알고자 제주 지인들과 함께 안으로 조심조심 들어갔다. 오키나와에서 '가마(동굴)' 답사를 여러 번 다녀서 잘 알고 있지만, 이런 곳에서는 발 밑을 조심해야 한다. 미처 다 수습하지 못 한 피해자들의 '흔적'을 파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큰넓궤 안에 들어가서 충격을 받은 것은, 단 하루도 밤을 보내기 힘들 것 같아 보이는 곳에서 주민 120여명이 두 달을 버텼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그 만큼 필사적이었던 것 같다. 가혹한 조건에서 버틸 수 있었던 힘은 학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생(生)을 향한 의지였으리라.
제주4.3에 관한 내 이해는 큰넓궤 안에 들어간 이후로 크게 갈린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범위 안에서 고통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였다.
일행과 이후 찾은 곳은 '알뜨르 비행장'이다.
알뜨르비행장에 관한 설명이 인상 깊다.
송악산, 단산, 모슬봉, 산방산 아래쪽 뜰이라는 의미를 가진 알뜨르 비행장은 일제강점기 시대에 일본이 중일전쟁으로 인한 전쟁의 전초기지로 삼은 곳이며 정뜨르 비행장과 함께 대표적인 일제의 군사시설이다. (정뜨르비행장은 현재의 제주공항이다.) 군용지이나 현재는 농지로 임차되어 농작물이 경작되고 있다.
가미카제 작전의 경우 흔히 한반도 밖에서 이뤄졌던 것이라 인식하기 쉬운데, 이곳에서 그 훈련이 이뤄졌다고 하니 놀랍기도 하다. 가미카제 훈련은 가고시마의 지란 특공대 공원이나, 사쿠라지마 등 일본 내에서만 행해진 것이 아니었다.
알뜨르비행장을 본 후 이동한 곳은 송악산이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 일본군은 미군과의 대 격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흔적을 송악산을 오르며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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