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에서 방문했던 섬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곳 중의 하나가 바로 게라마 제도諸島이다. 이곳에는 두 번 방문했는데 섬 안에 섬이 많고 갈 곳은 많지만 교통편 확보가 쉽지 않아서 무척이나 고생했던 곳이다.
첫 방문 때는 예약한 도카시키섬 택시가 2시간 넘게 오지 않아서 한여름 40도에 가까운 도카시키섬 선착장에서 무작정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게라마 제도 안의 도카시키섬이나 자마미섬 모두 인구가 600명 정도라서 렌트카를 하는 것도 쉽지 않은 곳이다. 자마미섬에 갈 때는 배 편 확보도 쉽지 않아서 개인이 운영하는 모터보트를 타고 가야 했다. 몇 시간 빌리는데 2만 엔 쯤. 일행이 몇 명 있어서 큰 부담은 아니었지만 하루에 도카시키와 자마미 두 곳 모두 다 돌아보는 것은 쉬운 일정 만은 아니다.
오키나와 본섬에서 도카시키섬으로 가려면 나하에 있는 도마린 부두 여객터미널에서 페리를 타야 한다.
도카시키행 페리는 편도 1690엔이고 소요 시간은 1시간 10분이다. 35분 걸리는 급행페리도 있는데 요금도 비싸고 주변을 조금 천천히 보고 싶다는 생각에 선택하지 않았다.
30-40분 쯤 지나자 도카시키섬의 윤곽이 뚜렷하고 가깝게 보이기 시작했다.
페리에서 기분 좋게 내려 도카시키섬을 둘러볼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여기서 만나기로 했던 택시 기사님이 보이지 않았다. 지인이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해봤다. 연결이 되지 않는다. 다시 걸어본다. 그제서야 전화를 받으신 기사님께서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하셨다. 2시간 후에 간다는 것이다! 40도 가까이 되는 더위인데 특별히 갈 곳도 없다. 다른 예약과 겹쳐서 손님을 보내준 후에야 올 수 있다고 하셨다.어쩔 수 없이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산책했다.
어슬렁거리다 오키나와 어류도감 같은 것을 들여다 보며 시간을 보냈다. 식당이나 까페 등도 주위에 거의 없고 있다 해도 문을 열지 않았다. 2시간 쯤 지나자 택시가 도착해서 바로 아하렌비치로 향했다. 2시간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비치다. 기사님 이야기로는 스쿠버다이빙의 명소라고 했다. 여름에만 오는 한국인 강사도 몇 명 있다고 했다.
연한 비취색 바다 색깔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스쿠버다이빙을 해서 들어간다면 아하렌비치의 산호초와 열대어를 볼 수도 있을 테지만, 시간도 없고 수영도 못 해서 엄두가 나지는 않는다.
게라마 제도에 속한 도카시키섬의 집단자결지를 방문했다. 이곳은 마을 사람들조차 잘 가지 않는다고 한다. 오키나와 전쟁 당시, 이곳에서 수많은 이들이 자결을 택했다. 이곳은 오키나와전쟁의 참상을 함축한 상징적인 장소다.
섬 주민들은 이곳에 유령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하지만 단순히 두려움이나 미신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역사의 무게가 서려 있는 곳이다. 함부로 발을 들이기보다는 잠시 멈춰 서서 그들의 고통을 기억하며 묵념을 올리는 것이 마땅하다. 전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한 이곳은,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침묵의 교훈을 전하고 있다.
함께 간 일행들과 묵념을 하고 우리는 도카시키섬 동쪽 전망대로 향했다. 마에섬, 나카섬, 하테섬, 구로섬 등 도카시키만 해도 제도인 것을 알 수 있다.
게라마 제도에 위치한 아리랑 위령탑을 방문했다. 이곳은 오키나와 전쟁 중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 위안부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장소다. 특히, 배봉기 할머니가 이곳 위안소에서 살아남은 경험을 증언해 더욱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위령탑을 둘러보면서, '환생'이라는 염원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단순한 재탄생의 의미를 넘어서, 아픔을 딛고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강한 염원이 담겨 있는 듯했다. 오키나와 전쟁의 한복판에서 이들이 겪었을 고통과 절망을 생각하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들의 고통은 단순히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전쟁과 폭력이 빚어낸 처절한 상흔이다. 이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겪었을 참혹한 역사를 잠시나마 마주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배봉기 할머니의 이야기는 가와다 후미코가 <<빨간 기와집>>이라는 소설로 써서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도카시키섬을 떠나 우리는 자마미섬으로 향했다. 작은 발동선을 타고 20여 분 만에 자마미섬에 도착했다. 첫 목적지는 다카쓰키야마 전망대였다. 전망대에 오르자 자마미 앞바다가 한눈에 펼쳐졌다. 맑고 푸른 바다와 자마미 제도의 작은 섬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곳에서 잠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한 후, 자마미제도 국립공원도 방문했다. 자마미섬은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경관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전쟁의 아픔도 간직한 곳이다. 섬 곳곳에는 전쟁과 관련된 위령탑들이 세워져 있었고, 그중 한 곳에서 전쟁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전쟁의 참상이 남긴 상흔을 되새기며,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위령탑 앞에서 묵념했다. 이곳에서도 집단자결이 일어났고 그것을 기억하고자 하는 탑이 세워져 있다.
페리를 타고 자마미섬을 떠나 나하로 돌아왔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역사적인 페리제독 상륙지를 찾아갔다. 해가 어둑어둑 지고 있을 무렵, 그곳에 도착하니 주변 풍경이 한층 더 고즈넉하고 신비롭게 느껴졌다. 상륙지 근처에는 외국인 묘지도 있어, 이곳이 단순한 역사적 유적지일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장소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100여 년의 시간이 한 순간에 지나간 듯한 느낌을 받으며, 이곳을 거쳐 갔을 사람들과 그들이 마주했던 시대의 흐름을 잠시나마 상상해보았다. 묘지의 고요함 속에서 당시를 살았던 이들의 삶과 죽음을 떠올리며, 시간의 흐름과 역사의 무게를 몸소 느끼는 듯했다. 나하에서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곳에서 느낀 감정들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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