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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벽을 넘어/국내 및 동아시아

도모리 석조 대사자상과 야마노구치 바쿠 시비 / 오키나와

by DoorsNwalls 2024. 9. 23.

도모리 석조 대사자상을 방문했다. 이곳은 일본 오키나와현 야에세정에 위치한 역사적인 명소로, 오키나와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석조 사자상으로 알려져 있다. 도모리 석조 대사자는 마을을 화재로부터 지키기 위해 세워졌으며, 마을 사람들은 이 석사자가 야에세산 쪽 화재가 발생하는 방향을 바라보며 화재를 막아주기를 기원했다. 약 300년의 세월 동안 이곳에서 도모리 석조 대사자는 무엇을 지켜봐 왔을까. 

富盛の石彫大獅子  일본 야에세조의 역사적 명소다
富盛の石彫大獅子  일본 야에세조의 역사적 명소다

도모리의 석조 대사자는 두터운 다리와 똑바르게 뻗은 등을 유지한 채, 강렬하게 불행을 막아내겠다는 의지로 꽉 다문 입을 가지고 있다. 화재로 인한 고통과 두려움에 떨었던 마을 사람들은 이 대사자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세웠고, 이 대사자는 화재가 발생하는 방향을 향해 사람들의 걱정과 불안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서 있었다.

 
석조 대사자를 뒤로 하고 야마노구치 바쿠 시인의 시비를 찾아갔다. 오키나와 출신의 시인이었던 야마노구치 바쿠는 일본 본토에서 생활하면서도 자신이 오키나와인임을 잊지 않고, 고향에 대한 애정을 시로 표현했다. 그의 시비는 그런 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야마노구치 바쿠 시비

 

 
직접 번역한 야마노구치 바쿠의 시도 한 편 붙여 놓는다.



오키나와여 어디로 가는가

자비센의 섬 
아와모리의 섬

시의 섬
춤의 섬
가라데의 섬

파파야에 바나나에
향귤나무(구넨보) 등이 열리는 섬

소철(蘇鐵)과 용설란(龍舌蘭)과 용수(榕樹)의 섬
불상화(佛桑花)나 데이고(梯梧)의 진홍색 꽃들이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는 섬 

지금 이렇게 향수가 이끄는 대로 
망연자실 하며
다시 한 줄씩
시를 쓰는 나를 낳은 섬
이제 와서는 류큐(琉球)라는 것은 명목뿐으로
옛 자취는 찾을 길 없고
섬에는 섬 길이만한
포장도로가 뻗어있어
그 포장도로를 걸어서
류큐여
오키나와여
이번에는 어디로 간단 말이냐

생각해 보면 옛 류큐는
일본의 것인지
지나(支那)의 것인지
서로 확실히 알지 못한
구석이 있었던 해의 일이다
타이완에 표류한 류큐인들이
생번(生蕃)에게 살해당했던 것이다
그 때 일본은 지나에게
우선 그 생번의 죄를 몹시 물었으나
지나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생번은 지나의 관할이 아니라 했다 한다
그러자 일본은 그렇다면 하고 나서서
생번을 정벌해 버리자
깜짝 놀란 것은 지나였다
지나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생번은 지나의 소할(所轄)이라며
이번에는 일본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한다
그러자 일본은 즉각
그렇다면 하고 나서서
군비 배상금과 피해자 유족의 무휼금(撫恤金)을
지나로부터 받아냈다
그 이후로
류큐가 일본의 것임을
지나는 인정하게 됐다 한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폐번치현 하에
결국 류큐는 다시 태어나
그 이름이 오키나와 현으로 바뀌어서
3부 43현의 일원으로
일본이 되는 길에 곧장 발을 내딛었다
그런데 일본이 되는 길로 곧장 나아가기 위해서는
오키나와 현이 낳은
오키나와어로는 불편해서 그 길을 걸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일본어를 공부하거나
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본어로 생활을 해보는 식으로 하여
오키나와현은 일본이 되는 길을 걸어왔다
생각해보면 폐번치현 이래 
70여년 동안 그 길을 걸어왔으니
그 덕분에 나와 같은 사람까지도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일본어를 써서
밥을 먹는데도 시를 쓰는데도 울거나 웃거나 화를 낼 때도
인생 모든 것을 일본어를 쓰며 살아왔던 것인데 
전쟁 따위 하찮은 것을
일본이라는 나라는 했구나

그건 그렇다 치고
자비센의 섬
아와모리의 섬
오키나와여
상처가 지독히도 깊다고 들었다만
몸 건강히 돌아와야 하느니
자비센을 잊지 말고
아와모리를 잊지 말고
일본어의
일본으로 돌아와야 하느니

*구넨보(九年母)는 오키나와 특산 향귤나무
*자비센(蛇皮線)은 오키나와 전통 악기 산신(三線)을 일본에서 부르는 속칭. 산신이 일본에서 개조돼 샤미센이 되었다고 한다.
*아와모리(泡盛)는 오키나와의 전통주. 좁쌀 혹은 쌀로 담근 독한 소주의 일종.
*데이고는 진한 분홍빛의 콩과식물로 오키나와의 현화.



야마노구치 바쿠(山之口貘, 본명 山口重三郎)

1903년 오키나와 나하시에서 태어나, 총 197편의 시를 남겼다. 1922년 상경해서 일본미술학교에 입학하지만 한 달 만에 퇴학. 1923년에는 생활고로 하숙비를 내지 못하고 야반도주하는 등 생활고에 시달렸다. 도쿄대진재 당시 오키나와로 돌아갈 것을 결의하며, 이후 야마노구치 바쿠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1924년 ‘류큐가인연맹(琉球歌人聯盟)’ 활동을 시작했고 미술전에 작품을 내는 등 화가를 지망했다. 1925년에 다시 상경했으며 1930년 이하 후유(伊波普猷)의 도쿄 집에서 오키나와 시인 이하 난테쓰(伊波南哲)와 함께 기식했다. 1932년 시인 가네코 미쓰하루(金子光晴)와 교류를 하는 등 시작에 몰두했다. 1937년에는 이바라키 출신의 야스다 시즈에(安田静江)와 결혼했다. 1938년 첫 시집을 출판한 후, 1939년 일본의 주요 문예지에 시 등을 게재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패전 이후, 1951년부터 오키나와의 일본복귀를 바라며 이하 난테쓰 등과 함께 오키나와 무용 모임을 개최했다. 1958년 34년 만에 오키나와를 방문했다.
1963년 위암으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