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시위(demonstration)가 아니다. 이것은 참여(participation)며 창조(creation)다.
우리가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또 모두와 함께 할 수 있는 운동이다. 리버티스퀘어에서. 뉴욕에서. 미국에서. 새로운 세상으로.
왕후이는 9.11이후 현 시대를 두 가지 다른 개념인 ‘리버럴한 세계화(liberal globalization)’와 ‘새로운 제국(new empire)’의 결합물인 ‘네오리버럴 제국주의(neoliberal imperialism)’라고 정의한다. 그가 제시한 개념 그대로, 9.11 테러 이후 경제적 세계화가 더욱 가속화 되면서, 금융자본이 국민국가의 법체계를 무위화(FTA) 시키며 국경과 주권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세계 통치시스템을 확립해 가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뒷받침하는 정보통신의 발전은 스마트폰을 통해 전세계(중국을 비롯한 일부 국가 제외)를 SNS로 묶어내면서 정보의 교환 속도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정보통신기술이 노동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수단으로 쓰일 수 있지만, 그와 반대급부의 기능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세계화)’에 항거(봉기)하는 주체들(multitude)이 출현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월가 중심부에 확보된 이들의 한 거점이었던 ‘리버티스퀘어(Liberty Square, 이하 자유광장)’는 세계적 네트워크를 통해 ‘연대’하면서 <제국>에 맞서는 도시별 ‘코뮨(commune)’을 형성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뉴욕의 문화와 삶은 세계 어느 도시보다도 ‘혼재(국적, 문화, 언어)’하는 동시에 ‘분리( ‘인종’ 및 ‘소득’에 따른)’되고 있다는 점에서 다양성과 가능성, 또한 그에 따른 한계도 명확하게 노출시키고 있다. ‘월가 점거운동들(Occupy Wall Street Movements)’이 기존의 시위와 다른 양태는 ‘마이크체크’라는 동시성을 갖는 발화양식, 다양성을 존중하며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전체회의 방식, 그리고 ‘다중’의 출현이라는 관점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마이크체크!”: 운동의 전이와 확산
월가 점거운동에서 “우린 99퍼센트다”라는 유명한 구호만큼이나 많이 들을 수 있는 말 중 하나가 “마이크체크(mic-check)”다. 마이크체크는 제너럴어셈블리(general assembly, 점거자 전체 회의)에서 의견을 표현할 때나 연대 연설을 시작하기 전에 외치는 말로 시위대의 발화방식을 상징한다. 마이크체크를 통해 발화자의 연설이 ‘휴먼마이크(human-mic)’를 통해 복창되면서 소리(의미)는 점층적 확대를 통해 앞에서 뒤까지 순식간에 전달된다.
시위대는 지난 11월부터 칼 로브(Karl Rove)를 비롯한 보수 정치인들의 연설을 듣고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마이크체크!”를 외치고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외쳤다. 시위대가 마이크체크를 통해 정치인들에게 요구한 것은 월가에 대한 규제, 부자 증세 등으로 운동이 2008년 전후 시작된 미국 금융위기와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음을 잘 보여줬다.
마이크체크는 수화를 통해 한 문장이 끝난 후에 바로 ‘동의’나 ‘반대’ 의사를 밝힐 수 있다는 점에서 시위자간 실시간 의견 교환이 가능하다. 지난 10월 23일 자유광장을 찾아갔을 때, 마침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의 저자로 잘 알려진 주디스 버틀러가 오픈포럼 연대(solidarity) 연설을 시작하고 있었다.
마이크체크. 제 이름은 주디스 버틀러입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이 전대미문의 민중적이고 민주적인 뜻에 지지와 연대를 표하기 위해서 섰습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도대체 여기 모인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 또한 그들은 사회적 평등이나 경제 정의 실현이 불가능한 요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불가능한 요구들이 ‘실재적’이지 않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우린 반대합니다. 만약 희망이 불가능한 요구라고 한다면, 우린 그 불가능함을 요구합니다. 만약 쉴 곳과 음식 그리고 일자리를 찾는 것이 불가능한 요구라면 우린 불가능함을 요구합니다. (...) 이것은 공적인 신체(the public body)를 둘러싼 정치들이며, 신체를 둘러싼 요구, 그리고 그 목소리를 통한 운동입니다. 만약 선거를 통한 정치가 사람들(people)의 의지를 반영했다면 우린 여기 있지 않을 것입니다.
“도대체 여기 모인 사람들의 요구”가 뭐냐는 사람들의 질문은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문제는 명확한 주체를 규정하기 힘든 이 운동의 성격과도 맞닿아 있다. 미국에서 실시된 여론 조사를 보면, 월가 점거운동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시각이 우세했지만 운동 목적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응답도 적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실시된 갤럽 조사(USA Today/Gallup poll) 결과를 보면 운동의 목적을 인정한다가 22퍼센트, 인정하지 않는다가 15퍼센트였고, 나머지 63퍼센트는 목적 자체를 잘 모르겠다고 응답했다.
예를 들어, 월가 점거운동 홈페이지(http://occupywallst.org/) 우측에 새겨진 “유일한 해결법은 세계혁명(the only solution is WorldRevolution)”이란 슬로건은 궁극적인 목적일 수는 있지만, 지나친 이상론으로 대중들이 인지 가능한 범위를 넘어선다. 이들이 시위를 조직하고 참여하는 방식도 단기적인 목표 달성을 위한 실력 행사보다는 장기적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유연한 시위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러한 성향은 경직되지 않은 방식과 일상적인 참여를 통해 공간을 점거하는 방식과도 연결된다.
월가 점거운동은 안과 밖, 주체와 비주체를 명료하게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지난해 가을을 시점으로 잡을 경우 그 운동 주체를 어느 정도 특정할 수 있겠지만 그 후 미국 각지로 운동이 확산되면서 그 중심이 어딘지를 찾아내는 것은 더욱 복잡해졌다. 지난 가을만 놓고 보면 애드버스터즈(Adbusters), 알렉사 오브라이언, 뉴욕 제너럴어셈블리, 예산삭감에 맞서는 뉴요커들의 모임까지 이 운동에 관여한 개인과 조직을 어느 정도는 나열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각양각색이다. 직군으로만 보더라도 교수, 학생, 고학력 실업자, 상이군인, 간호사, 전직 경찰, 전직 군인, 홈리스 등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로 수렴될 수 없는 다양성을 보여준다.
자유공원 안에는 뚜렷한 목적 의식없이도 이 운동에 공명해서 캐나다나 미국 서부, 중부 등지에서 찾아온 사람들도 많았다. 캐나다에서 시위대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드럼채만 들고 와서 양동이를 뒤집어 놓고 ‘드럼’을 치던 30대 청년, 시위대가 추위에 떨지 않게 하기 위해 45일 넘게(11월 13일 현재, 강제철거 이틀 전) 모자나 옷을 떠주던 할머니들도 있었다. 이들이 내는 목소리도 각자의 위치에 따라서 매우 달랐다. 주코티파크에서 직접 눈으로 확인한 그룹들만 해도 동성애자, 퀴어, 학생 론(loan) 정의실현 단체(Student Loan Justice.Org), 반전단체, 예술가단체, 각 노동자단체 등에 이르렀다. 더구나, 미국 각지로 퍼져나간 점거 시위의 방향성은 도시에 따라, 운동을 이끄는 사람들의 성향에 따라서 매우 다른 양태를 보이고 있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내’안의 다중성
시위대가 가시적인 목표를 내걸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현 정치경제 시스템에 심각한 문제가 있고, 그것이 월스트리트로부터 비롯됐다는 공통된 인식을 갖고 있다. 또한 현 자본주의 시스템이 지속될 경우 자신들의 후속세대에게 더 재앙적인 결과를 미칠 것이라는 인식과 함께, 금융 자본가들(1퍼센트)에게 보다 많은 세금을 걷어 불평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운동에 참여한 대다수가 공유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이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선 새로운 세상(a new world)에 대한 갈망을 표출하고 있다.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대단한 나라라고 하는데, 왜 노동자들이 여기서 살기가 이렇게 힘 든 것일까? / 시스템이 붕괴된 것이 아니다. 애초부터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을 뿐! / 미국은 끝났다 / 연방준비은행을 점거하라 / 점거하지 말고 월스트릿을 탈식민화하라! 이곳은 빼앗긴 땅이다 / 이 항거는 절대 끝나지 않는다 /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원한다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시위대와 만나면서 카네티가 ‘군중론’에 제시한 권력과 군중의 상관 관계,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생권력’에 대항하는 ‘다중(multitude)’에 대해 구체적인 대상을 통해 재고해 볼 수 있었다. 특히 다중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이란 생각을 해왔던지라 놀라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9.11 테러 이후 반세계화 시위는 G20 정상회의 등을 앞두고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지만 가능성보다는 운동의 한계를 일반인들에게 인식시켰던 시기이기도 했다. 자유광장에서 조우한 멀티튜드와 관련된 게시글들에서는 ‘개인’들이 자신의 주체를 공동체 속에서 사고하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다중(multitude)을 함포한다. 이것은 저항이 아니다. 이것은 미국의 악몽 현실적 압력 하에서 피어난 생명력과 이상주의에 대한 긍정이다.
위 게시글만이 아니라 자유광장안의 시위자들은 ‘내’가 타인들과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자연스럽게 공동의 주체 의식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우리는 99퍼센트다(We Are the 99 Percent)"라는 기존과 명확하게 다른 프레임은 1퍼센트와 대조되는 동일성(전체성)만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99퍼센트 안의 차이와 복잡한 층위(인종, 국적, 사상 등등)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반대목소리까지도 수용하며 나아가는 모습이야말로 월가 점거운동이 확대된 가장 큰 힘이었다.
기존의 운동들이 개인의 차이보다 전체적 결집력(단결)을 앞세워 원하는 목표를 성취하려고 했었다면, 월가 점거운동의 방향성은 자기 안에 있는 다중성을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인식하면서 새로운 '공간'을 점거하고, 연대와 자치의 가능성을 주체적으로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소통(대화) 방식은 ‘나’와 타인(외국인을 포함한), 그리고 개인과 지역-국가-세계 간의 관계를 보다 밀접하게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창출된 새로운 ‘주체’들의 자기 인식과 운동은 이제 막 시작했을 따름이다. 노암 촘스키의 지난해 11월초 시드니 점거에서 행한 연대 연설은 운동의 이러한 요소를 잘 짚어내고 있다.
이 운동들(movements)은 내 인생에게 가장 흥분되는 사건인 동시에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 사건이 될 것이다. 반드시 강력한 투쟁을 하라거나 현실적인 목표를 달성하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촘스키의 이 발언에는 시위대가 다양한 계층과 목소리들로 이뤄졌다는 이해와 함께, 이제 막 시작된 자각이 단기적인 성과 달성으로 끝나지 않길 바라는 염원이 담겨있다. 미국 시민들의 월가 점거운동에 대한 지지도도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뉴욕시만 보더라도 지난 11월 조사에서는 절반 이하(44%)가 운동을 지지(<DAILY NEWS> 2011.11.2 기사)한다고 했었는데, 12월 조사(Quinnipiac poll) 결과를 보면 68퍼센트가 지지의사를 그리고, 80퍼센트가 시위대에게 시위의 자유가 있다고 응답했다. 지난 11월 조사된 미국 전국 단위 조사(“Princeton Survey Research Associates” 실시) 결과를 보더라도 60퍼센트의 미국 시민들이 월가 점거운동에 대해 ‘완전히’ 혹은 ‘대체적으로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월가 점거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운동이 물리적 거리와 인종 및 국적 간 경계를 넘어서 확산돼 가는 과정에는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인들의 운동을 둘러싼 정서적 혹은 정치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른바 세계금융자본의 전지구적 확산과 폐해에 대해 다중을 인식하는 개인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광범위한 ‘저항의 공동체’는 오랜 산고 끝에 바야흐로 바로 눈앞에 태동하고 확산돼 가고 있다.
봄으로
지난해 10월 자유광장에서 일본 ‘시로우토의 난(素人の乱)’ 멤버와 조우한 것은 이 운동이 세계와 공명(共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일본 시위대를 보고 한 가지 깨달은 것은 월가 점거운동과 후쿠시마 원전사태가 서로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위 두 사건은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지만, 현대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두 가지 큰 축의 문제, 즉 안보(군사, 에너지) 및 경제와 관련돼 있다. 3.11 이후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체르노빌을 능가하는 세계사적 대재앙으로 변해 가면서, 일본 시민들의 전후 체제(핵안보체제)에 대한 반감도 증폭되고 있다.
<패배를 끌어안고(embracing defeat)>의 저자 존다워는 일본TV 특집 대담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샌프란시스코 체제 이후의 상황과 연관돼 있음을 밝히며, 원전 사태가 사회 변혁을 위한 가능성의 공간(space)을 열어젖혔다고 평가하면서, 열려진 공간이 닫히기 전에 시민들이 새로운 가치 체계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3.11 이후 일본의 상황과 월가 점거운동은 사건의 발단과 전개 과정이 매우 상이하지만, 두 사건 모두 미국이 수립한 정치적 혹은 경제적 정책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전자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후 일본이 미국의 동북아시아 정책을 60년간 내재화하면서 구축한 핵에너지 정책의 파국적 결과물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1%가 부의 대부분을 독점하는 월가의 금융 자본으로 상징되는 후기자본주의적 모순이 미국 시민들의 생존 기반을 근저에서부터 위협하면서 불거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광장에서 두 운동이 섞여 있는 현실은 인간이 인갑답게 살 수 있는 자연과 경제 ‘생태계’의 심각한 파손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양자가 문제의식을 서로 공유하고 공명(共鳴)하고 있음도 보여준다. 동시에 이 두 운동은 21세기 인류의 생존과 복지에 관련된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변혁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기도 하다. 월가 점거운동은 지난 9월 이후 미국 각지로 확산되면서 공적 시설인 공원 및 항만, 철도, 미술관, 학교 등을 점거하는 운동으로 퍼져나갔다.
2012년, 이들의 운동이 초기부터 보여줬던 다국적 금융자본의 전세계적 지배 구조에 대한 비판적 성찰(예를 들어, 반FTA 시위 등)이 지속된다면, 점거운동은 ‘미국의 99퍼센트’를 넘어서 ‘전세계 99퍼센트’를 위한 전지구적 점거 시위로 전이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점거운동이 자기만족적 단기 목표 달성이 아닌, 지속 가능한 탐닉을 계속해 나가고 있는 점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열망을 드러내는 동시에, 자기 성찰과 쇄신이 가능한 새로운 운동의 양태를 제시하고 있다.
# 이 글은 잡지에 게재했던 것을 블로그용으로 축약한 것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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