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인도 델리에서 아시아작가회의(The Asian Writers' Conference)가 열렸다. 아시아작가회의는 1958년부터 1980년대 말까지 이어진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the Afro-Asian Writers’ Conference)의 전신이기도 하다. 아시아작가회의에는 몽고, 네팔, 동파키스탄, 서파키스탄, 시리아, 이란, 이집트, 소련, 인도, 일본, 북한, 남베트남, 북베트남 등 17개국에서 150여명의 작가가 참석해 아시아의 평화와 미래에 관해 1주일 넘게 열띤 토론을 벌였다.
많은 아시아 작가들이 1950년대 미국과 소련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는 대안적이고 공생적 세계질서를 꿈꿨으나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그 기억은 희미하기만 하다. 그렇기에 현재 시점에서 아시아작가회의와 관련된 기록물을 들여다보아도 당시의 고양된 분위기는 상상해볼 따름이다. 더구나 냉전의 최전선에 있던 한국은 30년 넘게 이어진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에 사실상 제외되면서 체험담을 들려줄 작가가 한 명도 없다. 군사정권이 작가를 해외로 보내줬을 리 만무하다.
당시 아시아작가회의는 공산주의 색채가 강하다는 비판과 방해공작 속에서 힘겹게 모임을 성사시켰다. 준비위원회에서 한국과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의 작가들에게도 초청 전보를 보냈으나 공산주의 색채가 강하다는 이유로 아무런 답장도 받지 못 했다고 한다. 아시아작가회의는 반제국주의와 비동맹을 내세웠으나 공산주의자 모임이라는 서구의 흠집 내기와 맞서야 했다. 아시아작가회의에서 당시 발표한 ‘성명서(STATEMENT)’는 그런 의미에서 흥미롭다.
1956년 12월 23일부터 12월 28일까지 델리에서 개최 된 아시아 작가 회의는 역사상 처음으로 같은 연단에 아시아 17개국에서 작가들을 불러 모았다. 이 작가 모임은 신생 아시아의 새로운 정신을 상징한다. (중략) 진정으로 관용, 보편성 및 인본주의라는 오래된 아시아 전통에 따라 아시아 국가 간의 문화 협력이 다방면으로 전개될 것이라 믿습니다.
회의가 제국주의를 규탄하고 독립과 관련된 내용이었던 것과 달리 ‘성명서’는 ‘평화’와 ‘문화교류’를 앞세우고 있다. 회의 내용과 달리 ‘성명서’ 어디에도 제국주의를 규탄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위장으로도 혹은 후일 찾아올 분열의 흔적으로도 읽을 수 있다. 위장으로 보자면 서구의 흠집 내기를 의식한 결과이며, 분열의 흔적으로 보자면 회의에서 어떠한 합의도 사실상 도출하지 못한 결과라 하겠다,
홋타 요시에(堀田善衛, 1918-1998)는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 30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그런 만큼 홋타는 일본 작가들 중에서도 이와 관련된 가장 많은 기록과 작품을 남겼다. 홋타는 아시아작가회의에 참석한 유일한 일본인 작가였고 이후 거의 모든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에 관여했던 중심적인 인물로 1979년 제6회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앙골라)에서 로터스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아시아작가회의에 투신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남긴 기록을 보면 홋타는 1956년 당시 38살의 신인 작가로 선배 작가들에게 거의 등을 떠밀려 아시아작가회의에 참석했다. 왜 아니었을까. 선배와 동료 작가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주기는 했지만 자비를 털어야 했고, 일본 정부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 했으니. 1956년 무렵,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던 일본의 작가들이 냉전체제의 바깥을 아시아의 신생 독립국들과의 연대를 통해 모색하려는 움직임은 환영받지 못 할 행위였다. 그렇기에 일본 정부는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에 참석하려는 작가들의 비자 발급을 유예시키고 재정적 지원을 못 하도록 하는 등 핍박을 가했다.
일본문단에서 아시아작가회의에 홋타를 파견한 것은 그의 열린 아시아 인식 때문이었던 것 같다. 홋타는 일본의 패전을 중국 상해에서 맞이하고 그곳에서 2년 가까이 체류했기에 일본의 가해자로서의 위치를 내부자의 눈이 아니라 외부자의 눈으로도 실감한 몇 안 되는 작가였다. 그가 막상 아시아작가회의에 가보니 회의장은 혼란했다. 국제회의라고는 해도 이제 막 걸음마를 떼었으니 원칙이 제대로 있을 리 없었고, 일본과 달리 수십 명이 참가한 인도 측의 횡포 또한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회의가 통역도 없이 영어로 빠르게 진행되다 보니 홋타의 곤란함은 점차 더해갔다. 그때 함께 회장에 있던 한설야, 서만일, 김풍상(통역)이 능숙한 일본어로 홋타를 도왔다고 한다. 일본의 패전으로부터 11년 후 과거 식민자와 피식민자가 일본어를 매개로 재회한 순간이다. 한편 홋타는 아시아작가회의에서 애매한 일본의 위치를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비단 메이지유신 이후 서구의 눈으로 아시아를 응시하고 침탈했던 일본의 과거만이 아니었다. 당시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는 외국의 군대가 독립국이라고 일컬어지는 나라의 영토에 주둔하거나 군사기지를 두고 있는 경우나, 국민이 정치, 군사, 경제, 사회에 관한 계획이나 국민주권을 자신의 재량으로 완전히 행사하지 못 하는 경우 온전한 독립국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홋타는 냉전의 안에 있는 국가와 그 바깥을 향해 나아가서 아시아 아프리카와 연대해야 하는 난제와 이미 직면하고 있었던 셈이다.
홋타는 1981년 일본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문화회의에서 의장역할을 맡으며 지난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인도 뉴델리에서 아시아 15개국의 작가들이 모여서 제1회 아시아작가회의를 연 것은 1956년 12월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오늘날까지 아시아·아프리카 작가들의 운동은 많은 곤란을 헤치며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저희가 AA작가 운동을 시작한 것은 세계가 크게 변화하기 시작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무언가 광명에 가까운 것이 모두의 눈에 비치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순수한 기대를 품을 만한, 애써 말하자면 행복하기조차 한 시대였다고, 이제와 돌이켜보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무렵 아시아·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과 사람들은 독립과 해방을 위해 피를 흘리며 괴로운 싸움을 계속했는데, 저와 같은 작가의 눈에도 ‘정의’가 어느 편에 있는지는 명확히 볼 수 있었습니다.
1950년대 홋타의 눈에 비친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단순히 지명이 아니라 희망의 상징이었으며, 고난에 차 있지만 서구보다 윤리적 우월성을 지닌 곳이었다. 1950년대는 냉전체제와 거리를 두고 신생독립국이 연대해 새로운 공생적 가치를 찾기 위한 열망이 뜨겁게 불타올랐던 시기였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는 중소분쟁으로 분열되고 이후 영향력을 급속히 잃어갔다. 또한 아시아·아프리카로 불렸던 연대의 상징은 점차 제3세계로 타자화됐다.
하지만 그런 흐름 속에서도 홋타는 아시아·아프리카에 라틴아메리카를 더해 사유를 더욱 확장했다. 연대의 대상이었던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대상화되었던 1980년대 일본에서, 시대의 역행에 맞섰던 홋타의 노력과 헌신은 지금, 여기를 상기시킨다. 2020년대 한국에서 ‘아시아작가회의’, ‘아시아·아프리카’, ‘제3세계’는 과거와 같은 광채를 발하지 못 하고 있다. 해방 이후 한국 또한 점차 아시아의 눈이 아니라 서구의 눈으로 아시아를 응시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64년 전, 연대와 상생의 정신에 근거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보려 했던 아시아작가회의의 유산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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