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문학과 강원도와의 관련을 이야기할 때 김유정, 이효석, 박인환이 언급되는 일은 있었지만 김사량(본명 김시창, 1914-1950)이 호출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김사량은 1934년 이후부터 여러 차례 강원도를 기행한 후 다수의 기행문과 소설을 남겼다. 특히 김사량의 강원도 관련 기행문은 식민지 조선 사회의 부조리가 빚어낸 극빈층에 주목하고 있으며, 후일 이를 일본의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소설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김사량은 강원도의 화전민을 직접 보고 "비참한 세계"를 살아가는 '생명'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이는 김사량의 소설 세계를 이루는 한 축이 되었다. "비참한 세계"에 대한 자각이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첨예하게 인식하게 하는 촉매로 작용했던 것이다. 시기를 같이 해서 1934년 초고를 탈고한 일본어 소설 「토성랑」이 평양의 빈민굴을 소재로 한 것도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 김사량이 태어난 평양, 유학했던 규슈 및 도쿄, 기행 및 망명지였던 중국이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그가 “청초와 소박을 감수케 하는 곳 오직 강원도”라고 했을 정도로 특별하게 생각했던 강원도를 주목한 글은 찾아보기 힘들다. 더구나 강원도는 김사량이 최후를 맞이한 곳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김사량에게 강원도는 숙명의 땅이었다. 김사량은 6.25전쟁에 인민군 종군작가로서 참전했다 1950년 겨울 원주 부근에서 지병 때문에 낙오된 후 행방불명(현재까지 가장 유력한 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사량이 1934년 이후 강원도를 자주 방문했던 것은 홍천군 군수를 지낸 그의 친형 김시명(1907-?)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김시명은 1933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고 1935년부터 1940년까지 홍천군수, 평창군수, 강릉군수를 지냈다. 현재 홍천군 두촌면사무소 앞에는 일제 말 주민들이 세운 김시명의 송덕비가 그대로 남아 있다. 친형 김시명이 강원도에서 관료 생활을 오래도록 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김사량이 강원도에 자주 갔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김사량이 강원도를 오가며 쓴 작품은 다음과 같다.
*기행문
① 「〔학생통신〕 산사음(1-5)」(『조선일보』1934.8.7-11)
② 「〔동아문단〕산곡의 수첩:강원도에서(1-6)」(『동아일보』 1935.4.21,23,24,26-28)
③ 「산가 세 시간-심산기행의 일절」(『삼천리』1940.10)
④ 「화전지대를 간다1-3」(『文藝首都』1941.3-5) [일본어]
*일본어 소설
① 「풀숲 깊숙이」(『文藝』 1940.7)
② 「태백산맥」(『國民文學』 1943.2-10)
위 글 중에서 김사량이 「〔학생통신〕 산사음」과 「〔동아문단〕 산곡의 수첩:강원도에서(1-6)」를 쓴 1934년에서 1935년은 그가 문학적인 전기를 맞이했던 시기였다. 김사량은 일본 규슈(사가)에 몸을 두고 고향 평양과 강원도 등을 오가면서 식민지 조선의 위치를 중층적으로 파악하는 안목을 갖추기 시작했다. 김사량이 강원도를 기행하며 화전민을 집중적으로 다룬 것은 식민지 조선 사회의 불평등과 부조리를 그가 심도 있게 인식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이 두 기행문에서 김사량은 사물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작가 자신과 화자를 일체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확보해서 사물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그 이전의 동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사유와 창작이다.
이 두 편의 기행문은 일본어 소설 「풀숲 깊숙이」로 후일 이어지게 된다. 기행문에서 그 싹이 보였던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조롱과 비판은 일본어 소설 「풀숲 깊숙이」에서 꽃을 피운다. 「산가 세 시간-심산기행의 일절」과 「화전지대를 간다1-3」 또한 「풀숲 깊숙이」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소설이지만, 발표 시기는 소설보다 뒤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두 편의 기행문은 김사량이 1940년 8월부터 조선영화주식회사 제작 『화전민』과 관련해 다시 강원도 화전지대를 찾았을 때 쓴 글이다. 김사량은 1940년 4월에도 강원도를 답사했던 만큼 위 기행문에는 여러 차례 찾았던 강원도에 대한 복합적인 감상이 당시의 시국적인 상황과 연관돼 펼쳐져 있다. 특히 강원도의 '화전민'은 김사량의 강원도 관련 기행문과 소설을 관통하는 소재로 주목해 보아야 한다.
「산곡의 수첩」을 보면 1935년 당시 김사량이 귀성하며 고향 평양에 먼저 가는 것이 아니라 강원도를 찾아갔음을 알 수 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와병 중인 어머니가 계신 평양이 아니라 강원도를 찾아가야만 했던 김사량의 내적 심리는 어떤 것이었을까. 김사량은 강원도로 가서 자신의 "번민과 괴로움"을 장사지내려 했다. 일본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며 식민지 출신자로서 자각과 번민이 깊어져갔던 김사량의 내적 풍경이 이 기행문에는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인식은 「산곡의 수첩」에 삽입된 시 중에서 "오늘도 봄바람이 입술을 해우는 저녁 / 그대들 십자로에 거품을 물고 / 거지에 습전(拾錢)줌이 뿌르적이냐 아니냐 격론할 때 / 또 이곳서는 백성이 이산하야 거지되나니― / 나는 오늘 진실로 울을 일을 보았네"라는 구절에서도 단적으로 확인된다. 같은 민족의 생명이 굶어죽는 땅에 살건만 지배층들은 이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이론(理論)에만 빠져 허위에 가득 차 있는 모습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이는 유복한 집안에 태어난 김사량으로서는 사회비판인 동시에 자아비판이기도 했다. 이러한 인식은 김사량이 강원도를 기행하면서 획득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강원도는 김사량이 "비참한 세계"에 살아가는 생명에 눈뜨고 이를 식민지 조선 사회의 모순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했던 공간이었다. 그의 문학적 원천의 하나로 강원도가 존재 했기에 김사량은 귀성할 때면 강원도로 발길을 옮겼던 것이다. 그런 강원도 어딘가,아무도 모르는 곳에 김사량은 잠들어 있다.
김사량의 형, 김시명의 송덕비 / 강원도 홍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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