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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문 안에서/연구와 번역

오무라 마스오 문학앨범을 읽고

by DoorsNwalls 2024.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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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편 , 오무라 마스오 문학 앨범 ( 소명출판 , 2018)

 

‘외국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나라와 지역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특히 외국학은 근대 이후의 관계 맺기 방식에 따라 한 국가와 지역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강화하는 시기를 거쳐 왔다. 외국학 연구는 때로는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화 정책의 첨병 역할을 하기도 했었기에 반드시 ‘타자’를 향한 열린 이해로 나아가지 못 했다. 그렇게 본다면 외국학은 근대 이후 제국으로 변모해간 강대한 국민국가가 타 지역을 식민화하고 통치하는데 상당히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식민지가 된 지역의 엘리트들은 외국학 대신에 민족학으로 빠져들었다. 그것도 자민족의 결함을 자각하는 것에 집중했기에 ‘외국’은 원망과 동경이 뒤섞인 양가적 대상으로 인식됐다.
 
외국학 연구에 대전환이 찾아오는 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라 할 수 있다. 근대적 이성과 이를 바탕으로 한 세계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는 외국을 정보 획득의 대상만이 아니라 자기 성찰과 비판의 계기로 삼게 했다. 하지만 ‘해방’된 식민지에서는 과거의 응어리와 원념이 오랜 세월 동안 과거의 ‘종주국’을 외국으로서만 응시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됐다. 한국에서 구성된 일본학을 보면 이는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외국학’이라는 거울에 한국과 일본을 비춰보면 어떨까? 바로 그때 시사점을 알려주는 존재가 바로 조선문학(한국, 북한, 연변조선족문학, 연해주문학 등을 통칭) 연구자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1933년~)다. 오무라 마스오는 중국학 연구자 다케우치 요시미와 안도 히코타로의 제자로 중국문학 연구를 하다가 조선문학으로 방향 전환을 한 이례적인 경력을 지니고 있다. 오무라는 1950년대 후반부터 조선학으로 방향을 틀었으니 그로부터 거의 6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오무라가 했던 연구가 최근 한국 소명출판에서 6권의 저작집으로 묶여 나왔다.
 
외국학 연구자의 책이 그가 속한 나라가 아니라, 연구 대상으로 삼은 나라에서 저작집의 형태로 먼저 간행되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는 오무라 마스오의 조선문학 연구가 달성한 높은 가치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 그 가치는 전후(戰後) 1세대 한국학 연구자라는 최초성만이 아니라 탈식민화 과정에 있는 남북한을 그가 ‘외국학’으로써 어떻게 인식했는지와 밀접히 연관돼 있다. 오무라의 한국 인식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문장은 다음과 같다.
 
5월 서울에는 라일락 향기가 가득 차 있었다. 진달래와 비슷한 철쭉꽃이 진홍색으로 또 순백색으로, 초여름을 연상시키는 햇볕을 받아서 아름답게 보여도, 100송이 백합을 모아놓은 것 같은 라일락 가지 하나에 대적하지 못한다. 장마가 걷힌 후의 아카시아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혼을 뺏는 향기다. 오랜 세월 동경해 오던 땅에 실제로 몸을 두고서, 그 대지 위를 걸어 다닐 수 있는 기쁨에 나는 취해 있었다. 설령 북으로는 갈 수 없다 해도, 남반부에라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내 조국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사랑하는 대지를 밟았다. ( 138쪽)
 
내 조국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사랑하는 대지를 밟았다.

오무라가 “내 조국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사랑하는 대지를 밟았다.” 라고 쓴 것은 1973년 9월의 일이다. “사랑하는 대지”라는 표현은 외국학 연구자가 연구 대상 지역에 대해 쓸 수 있는 최대치를 나타내고 있다. 지배와 피지배,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 냉전과 독재 등이 역사적으로 복잡하게 뒤얽힌 상황에서 내면적 진실이 없다면 쉽사리 내뱉을 수 없는 ‘시적 언어’인 셈이다. 이러한 표현은 같은 세대의 조선/한국 인식과 비교해 보더라도 돌출돼 있다. 물론 오무라 마스오 또한 1930년대에 태어난 오에 겐자부로(1935~)나 와다 하루키(1938~)와 마찬가지로 전전의 세대와는 다른 전후민주주의자 세대의 아시아 인식(과거의 반성과 새로운 관계 설정)을 공통분모로 삼고 있다. 하지만 오무라가 오에나 와다와 다른 점은 ‘그 땅’과 ‘그 땅의 사람들’과의 유대와 신뢰를 주축으로 삼아 자신만의 연구를 일생 동안 쌓아올린 점이다. 오에와 와다가 아시아의 한 나라를 향해 “조국이라 부를 수 없지만 사랑하는 대지”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 책은 6장의 구성으로 이뤄져 있다. 1장이 윤동주 편, 2장이 김용제 편, 3장이 김학철 편, 4장이 임종국 편, 5장이 오무라 마스오 편, 6장이 인터뷰 모임이다. 장 구성에서 알 수 있듯이 오무라 마스오의 연구는 한국이라는 테두리를 넘어서 ‘한민족문학’을 상정할 때만 온전히 담길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문학적 시계(視界)가 아닌 동아시아적 시계에서만 이들은 포착될 수 있다. 그렇기에 오무라는 한민족문학의 통칭으로써 ‘조선문학’이라 용어를 사용한다. ‘조선’이라는 명칭은 전근대시기보다는 식민지 시기와 그 이후의 북한을 상징하는 기호처럼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통일시대를 상정한다면 민족명칭으로 명명한 한민족문학보다는 조선문학 쪽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모두 포함할 수 있는 명칭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오무라의 조선문학 연구는 광의로 볼 때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셈이다. 남북한 통일문학사의 시대가 도래 한다면 오무라 마스오의 조선문학 연구의 범위가 전범(典範) 중 하나가 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간략히 앨범의 구성을 설명하고자 한다. 앨범의 1장 윤동주 편은 저자가 1985년 연변에 체류하며 잡초에 묻혀 있던 윤동주의 무덤을 찾아내는 사진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윤동주의 무덤이 해방 이후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2장 김용제 편부터 5장 오무라 마스오 편까지가 오무라가 실제로 교류한 문인들과의 사진이다. 프롤레타리아 작가였던 김용제는 일제 말의 친일 협력으로 한국에서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다.
 
오무라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조선문학 작가는 김학철이다. 오무라는 김학철을 “무시무시하다고 할지 그런 삶입니다. 단순히 존경을 넘어 애처롭다고 해야 할지 그런 마음이 듭니다.”( 460쪽)라고 회고하고 있다. 오무라는 연변 체류 당시 김학철을 정기적으로 찾아가 이를 녹취했다. 그 만큼 김학철이라는 존재는 오무라의 조선문학 연구를 관통하는 한 축이라고 해도 좋다. 4장 임종국 편도 각별하다. 오무라 마스오가 <친일문학론>을 일본어로 번역하며 교류를 맺은 임종국과의 시간이 앨범에 담겨 있다. 특히 4장의 끝에 실려 있는 “친일 인명록 카드와 원고가 수북하게 쌓여 있고 그 옆에 검은 리본이 달린 선생님의 영정”(443쪽) 사진은 보는 이로 하여금 두 손을 모으게 한다. 5장은 오무라 마스오의 일대기를 입체적으로 담아냈다. 중국문학 연구자로 시작해 조선문학 연구자로 전환해간 과정은 물론이고, 한국 학자들과의 수십 년에 걸친 교류의 여정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거의 전 생애에 걸친 오무라의 조선문학 연구의 목적은 무엇일까? 과거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오무라는 1998년 호테이 도시히로와 했던 대담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저는 연구자로서 한국인들이 제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시대와는 이젠 작별하고 싶습니다. 우리 일본인들이 한국문학 연구를 하는 것은 크게 말하면 일본인의 아시아관을 변혁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조금이나마 일본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이유는 없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일본을 위해서 하고 있으니까요. 
 
한국인으로부터 한국문학 연구를 해줘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듣는 시대와 작별하고, “일본인의 아시아관을 변혁”시키는 것. 오무라의 ‘외국학’으로서의 한국문학 연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성립되고 있다고 하겠다.
 

흔히 외국문학 연구는 본고장에서는 홀대 받기 십상이다. 이를 테면 한때 외국인이 하는 한국문학 연구에 대한 시각이 그랬고, 지금도 그러한 경향이 완전히 없다고는 단언하기 힘들다. 이는 일본문학 연구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본고장과 외국이라는 경계가 점차 흐릿해져 가고 있다. 이는 디지털아카이브의 구축으로 1차 자료에 대한 접근성이 과거와 비교해 현저히 향상된 점과 동아시아를 단위로 하는 학제간 연구가 본격화 되면서 국민국가를 단위로 한 연구만으로는 연구 대상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게 된 것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 오무라 마스오의 저작집은 1990년대 냉전 ‘해체’ 이후 본격화된 학제간 연구의 정수를 삶과 체험으로 체화한 여정을 담고 있다.
 
상징적 존재는 무비판적 신화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상징적 존재는 외국학 연구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의 일본문학 연구자 도널드 킨의 존재는 미국 내 일본문학 연구가 도달한 지점을 보여준다. 도널드 킨은 미시마 유키오나 아베 고보 등을 비롯해 많은 일본문학자들과의 교류를 바탕으로 일본문학의 노벨상 수상에 크게 기여했다. 도날드 킨의 등장으로 미국에서의 일본문학 연구는 미국 나름의 독자성을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적 검토 또한 추후 이뤄져야 하겠으나, 도날드 킨 또한 전쟁과 역사의 무게를 어깨에 올려놓고 일본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일본문학 연구를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오무라 마스오(일본)의 조선문학 연구와 도널드 킨(미국)의 일본문학 연구는 묘한 지점에서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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