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안전 신화의 붕괴/해체
현대 과학 문명은 페일세이프(fail-safe)를 전제로 성립된다. 이는 시스템이 오동작해서 벌어진 사고를 항상 안전하게 제어할 수 있다는 안전장치와도 같은 것으로 오작동을 전제로 한다. 공학도들에게 매우 익숙한 이 개념은 일본 조직 사회를 지탱한 ‘매뉴얼(マニュアル)’과 연동해 많은 일본인들에게 일본의 기술 문명이 절대적으로 통제되고 있다는 ‘안전 신화’를 창출했다. 페일세이프는 후쿠시마 원전은 물론이고 지진에 대비한 각종 설계에도 적용됐지만, 3.11 대지진으로 ‘제어 불가능’이라는 문제와 직면하게 됐다.
울리히 벡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발생했던 1986년에 출판한 『안전사회(RISIKOGESELLSCHAFT)』
에서 근대성의 한계점과 과학 기술의 무제한적 발전이 예측 불가능한 ‘위험 사회’를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재생산된 불안감이 계급을 초월해 ‘평등’하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특히 그가 위험사회를 초래하는 요소로 제시한 것이 과학기술에 기반한 군사력과 경제력이라는 점은 이번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핵심을 이루는 요소이기도 했다. 이번 쓰나미는 일본이 몇 십 년 간 공들여 준비한 재난재해 방어 시스템을 일순간에 무력화시킨 것이었다. 한 예로 지난해 세계 기네스북 등재가 확정된 이와테현(岩手県) 가마이시(釜石) 항만 방파제(30년 공사 2009년 완공)를 일순간에 무력화시키고 해안 마을을 휩쓴 것은 이번 재난의 규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위키릭스(WikiLeaks)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은 2008년 12월 IAEA로부터 “후쿠시마 원전이 강한 지진이 오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경고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는 이러한 위험 요소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가 원전을 계속 가동한 사실이다. 리스크를 무릅쓰면서도 원전을 계속해서 지어나간 것은 원전 수출과 향후 핵무장이라는 문제와 맞물려 있는 문제로, 결국 원산복합체(原産複合体)의 부작용이 터져 나온 것이라고 해야겠다. 가와무라 미나토(川村湊)는 사건 발생 후 맹렬한 속도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만들어낸 ‘전범’을 추려내 책으로 내놓았는데, 이 책을 보면 도쿄전력이 얼마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주간현대(週刊現代)』5월호는 이번 원전사태를 낳은 것이 나가타초(永田町)의 정치가, 원전추진파 학자, 매스컴이 오랜 기간에 걸친 유착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특집 기사를 게재하고 있다.
울리히 벡은 “환경 문제는 사회 외부 문제가 아니라, 철두철미하게(발생과 결과 모두) 사회적 문제”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일본 정치인들은 3.11 대지진의 책임을 사회 외부의 전능한 자연에서 구하려고 한다. “역사상 유례없는 대재앙”이라는 뉴스는 대재앙으로 빚어진 모든 사태가 사회 외부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한다. 도쿄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는 3월 15일 기자단 회견에서 “쓰나미를 잘 이용해서, 아욕(我慾)을 깨끗이 씻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중략) 이건 역시 천벌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패전 후 전쟁 책임을 일본 제국의 전 구성원에게 전가했던 ‘1억총참회론(一億總懺悔論)’에 버금가는 전형적인 책임 회피 논리와도 상통한다. 관련된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위정자가 말하는 것은 자신들도 국민들과 같은 정도만 반성하면 된다는 논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망언에도 불구하고 이시하라 신타로는 지난 4월 10일 실시된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3선에 성공했다. 그가 공약과 선거 활동이 모두 ‘방재(防災)’였다는 사실은 ‘도쿄’가 안전하다는 미디어의 보도와는 달리, 도쿄 시민들이 원전 사태로 인해 공포 속에서 생활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주고 있다.
NHK를 비롯한 주요 언론사들이 원전 피해에 대해 안전함을 강조하는 논조를 지속적으로 펼치면서 쓴 어구가 “타다치니겐코히가이와나이(直ちに健康被害はない)”다. 이 말은 “바로는 건강에 피해가 없다”라는 것인데, "바로는 없다"는 말은 "후일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말은 연말 유행어 시상식에서, "에다노 네로!(枝野寝ろ)"와 "칸 오키로!(菅起きろ)"와 함께 순위권에 노미네이트 돼 ‘올해의 유행어’ 대상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일지도 모른다. "에다노는 자라!"와 "칸은 일어나라!"라는 유행어는 일본 정치인들의 리더십 부재를 따끔하게 꼬집는 언어유희로 외신에도 비중있게 다뤄졌다. 특히, 책임 당국의 제1인자가 뒤에 숨고, 2인자가 앞에 나서는 형식의 대국민담화(에다노 관방장관이 전면에 나서는)는 일본 국민들의 정치 불신을 조장했다.
3.11 대지진은 매뉴얼에 많은 부분을 의존해서 움직이는 일본 사회의 경직성과 관료주의의 폐해를 드러냈다. 일본 사회는 작은 학회지를 만드는데도 선배들이 꼼꼼하게 만들어 놓은 매뉴얼이 존재한다. 실제로 나는 학회지 작업에 참여하면서 회계와 발송 등에 관한 노트 한 권 분량의 손으로 직접 쓴 매뉴얼을 넘겨받은 적이 있는데,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약간 바보스러울 정도의 세세한 것까지 다 적혀있었다. 하지만 같이 작업하는 동료들은 그것을 차례대로 따라서 작업을 진행했다. 이러한 매뉴얼은 개인적인 일처리 보다는 조직 사회에서 공동 작업을 할 때 위력을 발휘하며, 한 개인이 거역하기 힘든 기존 체계에 대한 학습과 답습을 요구한다. 하지만, 매뉴얼은 변수의 폭이 제한적이라는 문제점과 단계를 생략하거나 뛰어넘을 수 없다는 점에서 촌각을 다투는 재난 상황이 닥쳤을 때 오히려 화를 불러올 위험성을 내포한다. 그런 의미에서 안전 신화 붕괴의 이면에는 사회 조직 자체의 경직성도 한몫 했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공공의 복지와 시민의 권리
나는 대지진과 원전 사태를 겪으면서 일본사회에 만연한 관료주의와 일본시민들의 ‘주체성’ 문제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게 됐다. 여기서 진부한 ‘일본인론' 혹은 ‘일본문화론’을 다시 들고 나올 생각은 없다. 다만, 일본에 사회 변화를 이끌 정도의 주체성을 갖은 시민사회가 형성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매우 어렵고 지난한 과제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메구로구미술관(目黒区美術館)에서 4월 9일부터 열릴 예정이었던 <원폭을 본다(原爆を視る) 1945-1970>전이 개최 중지된 사건은 ‘공공의 복지’와 ‘시민의 권리’를 놓고 각 방면에서 내홍을 겪고 있음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미술관 측이 내건 전시회 중지 이유는 원전 사고로 심각한 영향을 받은 많은 분들의 심정을 배려해서 혹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피폭 우려가 있는 도쿄 사람들이 전시회를 보고 느낄 불안감과 사회적 파장을 우려해서 취한 조치라고 하는데, 사실상 최근 빈번해 지고 있는 ‘원전반대 데모’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피폭 경험이 시각화돼 일상에 펼쳐져 시민들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과거와 교차 경험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일본어에는 ‘무라하치부(村八分)’라는 말이 있다. 일본의 촌락에서 법도나 질서를 어긴 사람을 마을 사람들 스스로가 공동으로 절교를 했던 행위로 현재에도 일부 촌락에 그 전통이 남아있다. 이단아로 찍히게 되면 촌락 생활에서 장례 절차와 방화를 제외한 거의 모든 활동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것인데, 실질적으로는 마을에서 추방당한 것과 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이 행위는 사실상 지역의 유력자의 권익과 연관된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비합리적인 현실에 대한 이의 제기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무라하치부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일본 사회 주류를 이루는 조직 곳곳에서는 '개성' 보다는 '협업'이 중시되며, '개인'적 역량보다는 '조직'의 조화가 우선시 돼왔다. 이것은 물론 정도의 차이의 문제로 세계 어느 조직에도 일정 부분 이러한 요소가 존재한다. 다만, 후쿠시마원전 사태와 같은 초대형 인재가 발생했음에 불구하고, "비합리적인 현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시민 주체가 매우 소수라는 사실은 일본 사회의 위와 같은 전통과도 일정 부분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이러한 사회적 요소들은 시기와 상황에 따라 급변할 수 있기 때문에 사태의 추이는 좀 더 시간을 갖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후쿠시마 원전사태로 인한 대규모 재앙이 현실화된 상황에서 일본의 "공공의 복지"가 무엇인지 또한 "국민의 권리"가 무엇인지를 내부자인 동시에 외부자의 시각으로 재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지난 4월 12일 후쿠시마 원전이 체르노빌과 같은 레벨7으로 그 위험도가 상향 조정되고, 5월 4일 IAEA 브리핑에서 "전체적으로 후쿠시마 제1원전 상황이 여전히 매우 심각한 상태"라는 상황 보고가 터져 나오고 있지만 말이다. 즉 시민의식이라는 것이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공공의 복지(국가의 번영)"를 위해 시민들이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상황은 매우 우려할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최근 도쿄 곳곳에서 트위터 등을 통해 시위가 갈수록 격렬해 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향후 원전 반대 시위는 대규모로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시민 사회 움직임과 맞물려 학계에서도 원전 문제를 재검토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일본은 현재 원전 추진파와 반대파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현재 상황만을 놓고 보면 후쿠시마 원전을 제외하고 나머지 원전을 전부 폐쇄하는 것은 힘든 상황이다. 5월 들어서 간 간 나오토 총리는 일본의 원전 정책 전면 수정을 밝히며, 시즈오카의 하마오카(浜岡) 원자력발전소 가동을 중지시키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것은 일단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보자는 식이지 완전 폐쇄 방침과는 거리가 멀다. 한 예로 4월 10일에 시바공원(芝公園)에 천여 명, 코엔지(高円寺)에 7천여 명이 모여 데모를 했다. 이 두 데모는 전자가 원전 정지를 외쳤고, 후자는 원전 완전 폐지를 위한 데모였는데, 당일 NHK뉴스에서는 전자만을 보도했다. 더구나 NHK는 연일 원전이 안전하며 자원이 부족한 일본에는 필수 불가결한 원전 옹호 캠페인을 전개 중이다.
문제는 국가적인 동시에 지역적이고, 또한 세계적이다. 이번 사태는 일본이라는 국민국가 차원의 문제와 도후쿠 지방이라는 지역 문제를 나눠서 살펴보지 않으면 안될 만큼, 지역에 따라 그 입장과 대응 그리고 고통의 정도에 큰 편차를 갖고 있다. 세계적 문제라는 사실은 먹거리에서도 확인된다. 우리가 즐겨 먹는 꽁치(일본에서는 삼마라고 부른다)만 하더라도 원전 사태로 식탁에서 한동안 태평양산을 올리기 힘들게 됐다. 일본 정부가 도호쿠 지방 쿠릴 열도 어장에 영향이 없다는 발표를 했지만, 당분간 일본산 꽁치를 사먹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처럼 일본에는 간사이와 간토의 미묘한 갈등이 존재한다. 이도 토시조(井戸敏三) 효고현 지사는 2008년 11월에 열린 긴키(近畿) 지역 지사회의에서 “간토(關東)에 대지진이 일어나면, 도쿄는 파괴되고 간사이(關西) 경제에 절호의 기회가 온다”라는 발언을 서슴없이 해서 물의를 일으킨 적도 있다. 실제로 많은 조선인들이 거짓 소문으로 살해된 간토대진재(關東大震災 1923.9.1) 당시 많은 은행과 신문 출판사들이 거점을 간사이 지방으로 옮긴 적도 있다. 이런 과거 사건들을 돌이켜 보지 않더라도, 일본 내에서도 각 지역에 따라 3.11 대지진 이후 입장과 대응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역 사회 권익 보호와는 다른 차원에서 학계, 시민 사회 연대 움직임은 느리지만 지속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공공의 복지’가 ‘시민의 권리’와 겹쳐지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안전한 삶이 제한받게 된다면 문제는 다시 시민 주체로 결부된다.
비공약적 인식을 넘어서
3.11 대지진 이후 일본 시민들의 차분하고 질서 정연한 대응 이면에는, 보도되지 않은 수많은 사건과 사고 그리고 혼란함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추측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언론이 보도한 것은 질서 정연하고 운명에 순응하는 자신들이 모습이었다. 더구나 이러한 일본인상(日本人像)은 기존 관념과 결합돼 세계 최고 수준의 질서 의식을 갖은 ‘선진’ 시민 표상을 창출해 냈다. 이미지와 현상(現像) 사이의 간극은 정부-미디어의 유착(통제)을 통해 발신되지만, 최근에는 그 틈을 트위터와 블로그 등이 파고들면서 일방적인 이미지화 작업은 매우 곤란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많은 사람들이 매스미디어와는 다른 의견을 발신한 원전 전문가의 블로그와 개인 트위터에 몰려들고 있다. 대지진 이후 원자력추진파에 대한 배싱(bashing)이나 민주당에 대한 극도의 불신은 향후 일본의 정치권력은 물론이고 시민 사회에 새로운 지형도를 그려낼 것이다.
이번 대지진은 결과적으로 일본의 안전 신화 및 기술에 대해서는 회의를, 일본인들의 차분하고 질서정연한 대응에는 찬사를 불러왔다. 후자의 경우 기존의 일본문화론과 겹쳐지면서 고정 관념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쉽게 한 나라를 단일 술어로 잘라 말하지만, 국가가 아닌 한 도시인 도쿄만 놓고 보더라도 삼십만을 넘는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세계 각국 문화가 믹스된 곳이라는 사실은 쉽게 잊어버린다. 한류가 일본에서 2004년을 기점으로 급속하게 성정하면서 일본인들의 한국관이 상당부분 바뀐 것 또한 상호 교차적인 이동과 미디어 산업에 힘입은 바 크다. 변화의 속도는 앞으로 더욱 빨라질 것이며 한일 양국의 상대방에 대한 이미지 또한 앞으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바뀌어 갈 것이다. 1960년대 안보투쟁(安保鬪爭) 당시의 일본인과 현재 일본인을 비교해 보면 이러한 간극은 쉽게 확인된다. 그 누가 일본의 취업 빙하기 세대 청년들과 1960년대 전공투세대(全共闘世代), 1980년대의 버블세대를 똑같다고 할 수 있는가.
안보투쟁: 1959년부터 1960년, 1970년에 걸쳐 일본에서 전개된 일미안전보장조약에 반대하는 일본 사상 최대 규모의 반정부 반미운동을 수반하는 정치 투쟁.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이용한 시위대의 모습은 당시 일본 사회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여전히 패턴화된 문화론 혹은 민족론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대형 미디어들은 사회적 변화 요소를 제거한 채 자신들이 보고 싶어하는 정보만을 재편집해 대중들을 움직인다. 3.11 대지진 이후 터져 나온 외신의 일본인상은 그런 의미에서 한 면만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불균형적인 경험과 시각 정보를 통해 조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미디어가 내세운 질서 정연한 일본인의 모습은 기존의 일본인론과 결합돼 그 이면에 있는 무질서와 혼란을 봉합하는 결과를 낳았다.
최근 연이어 도쿄 도심부에서는 연일 원전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도쿄 도심부에서 정치 현안을 놓고 몇천 명 단위의 시위가 벌어지고 체포자가 발생한 것은 거의 30년만이다. 혹자는 이번 대재앙으로 일본 사회가 더욱더 우경화 일로로 치달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하지만 이러한 판단은 변화하는 정세와 시민 주체의 움직임을 간과한 단선적인 문화론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일본에서 대규모 정치 데모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은 버블세대(1980년대) 이후에 생겨난 것이지, 그 이전의 안보투쟁 세대에게는 존재하지 않던 감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일본 시민들의 잠들어 있던 정치의식과 새로운 정치 주체의 출현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기점이기도 하다.
대재앙과 원전사고가 단일 국가의 특수한 경험이 아닌, 세계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라는 관점의 결여는 경험의 공유를 제한하고 일방적인 동정 혹은 “꼴좋다” 식의 민족 감정 해소의 장으로 악용된다. 그 결과 상호 경험 공유와 재난 대비는 비공약적(非公約的)인 국가/민족의식으로 수렴되는 동시에 멀어진다. 하지만 문제는 지역적인 것에서 일본으로 그리고 세계로, 확산 일로를 걷고 있다.
#이 글은 저널에 게재했던 글을 블로그용으로 축약 편집한 것임을 밝혀둔다.
'도시의 문 안에서 > 연구와 번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게 문학이란 무엇인가? (0) | 2024.09.10 |
---|---|
일본어로 쓴 아시아문학-반경 2km에 응축된 세계 (0) | 2024.09.10 |
최승희가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0) | 2024.09.09 |
오무라 마스오 문학앨범을 읽고 (0) | 2024.09.08 |
오키나와를 둘러싼 전후와 냉전을 묻다 (0) | 2024.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