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키하마 신(崎浜慎)
오키나와는 내가 나고 자란 곳이다. 최근에는 푸른 바다와 하늘이 널리 알려져 관광지로써 한국, 중국, 대만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있다. 오키나와는 일본 열도 남단에 있으며 50개 가까운 유인도(有人島)를 포함해 난세이제도(南西諸島)라 불린다. 오키나와 본섬은 그 중심에 있으며 인구는 약 145만 명으로 현민(県民)의 9할이 이곳에서 거주중이다.
흥미롭게도 오키나와에서 동아시아 각 도시까지 거리는 비교적 가깝다. 오키나와현의 중심지인 나하(那覇)로부터 1500km 권내에 오사카, 타이베이, 난징, 서울, 평양, 마닐라, 상하이, 홍콩 등이 위치해 있다. 오키나와는 동아시아 각 도시에 인접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오키나와라는 지역은 일본인을 제외하면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시험 삼아 미국에 사는 사람에게 오키나와가 어디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잘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다. 유럽이나 그 외의 나라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리라. 해외 사람이 오키나와를 잘 알고 있다면 그것은 특정한 분야에 관심이 있는 경우다.
반(反) 미군기지·평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오키나와는 ‘기지의 섬’으로 알려져 있다. 전후 74년이 지난 현재도 미군기지는 오키나와 본섬에 배치돼 있다. 베트남전쟁 당시에는 B52폭격기의 이륙기지로써 북베트남 공중 폭격에 가담했다. 베트남 사람이 오키나와를 ‘악마의 섬’으로 불렀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오키나와에는 이와는 다른 문화적인 측면도 존재한다. 가라테의 발양지로 세계에서 가라테를 배우는 수련자에게는 성지로 여겨진다. 또한 ‘예능의 섬’으로 불리는 것처럼 산신(三線) 등의 악기로 연주하는 독특한 음악도 널리 알려져 있다. 현대음악 분야에서는 팝스타, 아무로 나미에(安室奈美恵)가 아시아에서도 인기를 구가했다.
이처럼 오키나와는 다양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어서 한 면만을 강조해 정의내리기 어려운 곳이기도 하다. 다만 오키나와의 역사를 들춰 보면 특징적인 부분이 보인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오키나와는 긴 역사를 거치며 정치적 사회적 타자에게 지배를 받은 경험을 지닌 곳이다.
15세기에 류큐왕국(琉球王国)이 세워졌지만 1609년에 사쓰마번(현재의 가고시마현)에게 침략을 당했다. 그 전까지도 중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진공을 했던 류큐왕국은 이중 지배를 받게 된 셈인데 일본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두 나라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사쓰마번의 속령이 되는 것을 감수했다.
메이지 정부가 중앙집권화 정책을 추구하면서 류큐왕국은 멸망하고 1872년에 류큐번이 설치됐으며, 1879년에는 오키나와현으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우리는 류큐왕국에서 오키나와현으로의 변화를 일본 국내에서 발생한 식민지 정책의 사례로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아시아 여러 나라로 향해간 일본의 식민지 정책의 앞선 사례였다. 일본은 1874년에는 대만 출병, 1910년에는 한국병합 등 이웃 나라로 식민지 정책을 강경하게 추진해 갔는데, 오키나와를 지배한 ‘성공적인 사례’가 그 기저를 이루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식민지정책의 한 형태로 언어동화 정책을 들 수 있다. 한국, 대만에서 철저한 일본어 교육이 이뤄졌던 것처럼 오키나와에서도 학교에서 방언을 금지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제했다. 이제 오키나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본어만을 읽고 쓸 수 있다. 데리다가 지적한 것처럼 “단 하나의, 우리의 것이 아닌 모어”는 오키나와인에게는 바로 일본어다. 한국, 대만, 오키나와는 일본의 언어동화 정책을 문화적 억압의 경험으로써 공유하고 있다.
또 하나 오키나와의 경험으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은 미군의 점령이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지 27년 동안 오키나와는 일본과 분리돼 미국의 통치하에 놓였다.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74년이 지났으나 미군기지는 여전히 오키나와에 있으며 본섬 면적의 약 20%를 점유하고 있다. 미일안전보호조약을 대신 떠맡는 형태로 재일미군기지의 약74%를 오키나와가 떠안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다. 일본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오키나와에 대한 차별 구조는 전후에 변함이 없어서 오키나와 사람들이 끈기 있게 반기지·평화운동을 전개해도 일본정부는 꿈적도 하지 않는다.
중국·일본·미국 등 타자의 지배와 통치를 받아온 것은 오키나와인의 정신에 영향을 미쳤으나,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문학을 시작으로 한 예술의 표현양식은 그 영향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인간을 그리는 문학은 그 중에서도 가장 유효한 방식일 것이다.
한 지역 특유의 문학―이른바 마이너문학―은 어떻게 탄생하는 것일까? 언어적으로 소수여야 하며, 민족·인종적으로 다수자로부터 고립돼 있는 것만이 마이너문학의 성립 조건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문학은 단지 외재적 요인만으로 탄생하지 않는다. 내재적 필연성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몇 만자 이상의 소설을 쓰는 고행을 누가 기뻐하며 한단 말인가?
전후 오키나와문학에 초점을 맞추면 미국의 통치, 그리고 일본으로의 복귀 등 오키나와 사회의 심정을 반영하는 문학 작품이 차례차례 나왔다. 오시로 다쓰히로(大城立裕)의 「칵테일 파티」(1967년), 히가시 미네요(東峰夫)의 「오키나와 소년」(1971년), 마타요시 에이키(又吉栄喜)의 「긴네무 집」(1980년), 메도루마 슌(目取真俊)의 「물방울」(1996년) 등은 억압받는 오키나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응시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우리의 ‘삶’을 억압하는 것에 저항하는 것. 마이너문학은 그것으로부터 탄생한다. 식민지 정책만이 아니라 모든 억압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주체성이 요청된다(‘우리’는 이런 식으로 억압받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저항한다). ‘우리’를 세우기 위해서야말로 마이너문학은 존재한다. 여기서 유의 하고 싶은 것은 이런 특수한 상황은 오키나와문학만의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억압 받은 대부분의 지역이나 사회에는 독자적인 마이너문학이 발화한다. 식민지 정책을 강행한 일본에 대항해 한국과 대만에서도 그 시대 특유의 마이너문학이 탄생했다. 한 나라 안에도 또한 분단된 지역사회의 독자적인 문학이 있다. 민족·인종, 젠더, 경제, 계급 등의 구획에 의해 소수자가 모든 방면에서 출현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또한 어떤 의미에서 소수자화 되고 있다.
오키나와문학은 상황에 저항하기 위해 존재했다. 정치적 사회적 억압에 대항해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그린 것이 오키나와문학이었으며, 소수자나 다수자를 가리지 않더라도 그것이 문학이 본래 추구해야 할 왕도였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오키나와문학은 오키나와문학임을 일목요연하게 드러내 왔다. 이른바 주체를 억압하는 것에 저항하는 문학이라는 각인이 작품에 찍혀 있었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본과 미국, 그리고 오키나와의 차이를 파악함으로써 소수자적인 요소가 두드러졌다. 오키나와문학은 자신을 억압하는 상대방을 공격하는 문학이었으며, 그것은 당시 오키나와 사회의 정세와 운동과 연동된 흐름이기도 했다. 오키나와문학은 일본문학에 뚫린 구멍이었으며 이의 제기였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 무렵부터 오키나와문학을 둘러싼 상황이 바뀐 것처럼 보인다. 이물스러운 것이어야 했던 오키나와문학이 이물스러움 자체를 오리지널한 것으로서 인정받고 널리 수용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마타요시 에이키의 「돼지의 보복」(1995년)은 오키나와의 토착성이나 민족성이 평가받은 소설이지만 좋게도 나쁘게도 ‘오키나와다움’만이 주목받았다는 의미에서는 불행한 소설이다. 오키나와문학이 널리 일본사회에 받아들여지는 상황을 기뻐해야만 할 것인가? 수용된다는 것은 보다 큰 것에 포섭된다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위험하다는 실감을 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오키나와 측의 저항은 그 자체로 인정을 받았으나 이윽고 커다란 질서에 회수돼 갔다.
문학의 기반으로 삼는 ‘차이’가 그곳에서는 사라지고 만다. 우리는 글로벌화의 파도에 삼켜져 자신과 타인의 구별이 애매해진 사회에서 살아간다. 도대체 자신이 대치중인 ‘적’은 무엇인가―반드시 적을 설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억압받기에 거꾸로 들고 일어나는 주체도 애매함이라는 안개에 뒤덮여 흔들린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작가는 어떤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쓸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다수자가 원하는 내용에 따르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일상에서 대량으로 양산되는 라이트노벨, 엔터테인먼트 소설 등은 소비되기 위한 상품에 불과하다. 시대에 억지로 역행하는 듯한 마이너문학을 지향한다고 해도 적대관계를 구축하는 이분법적인 수단은 시대착오라며 냉소를 받기 쉽다. 마이너문학은 이미 성립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오키나와의 작가는 이런 상황 속에 놓여 있다. 지금까지 오키나와문학을 지탱해온 작가들은 왕성하게 작품을 쓰고 있지만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 하고 벽에 부딪친 것처럼 보인다. 또한 차세대 작가가 거의 없다는 것도 심각하게 생각해야만 한다. 오키나와에서는 지역 신문사가 주최하는 두 개의 문학상이 있고, 매해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다. 그럼에도 오키나와문학을 짊어질 새로운 작가가 나오지 않고 있다. 마이너문학으로서 존재했던 오키나와문학은 이제 기능이 끝나가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일본 어디에 가도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식의 소설이 출판된다. 또한 세계 곳곳에서 하루키의 소설이 번역돼 읽히고 있다. 그것 자체는 나쁘지 않으나 그러한 균일성·획일성은 어딘가 으스스하기도 하다. 마이너문학의 쇠퇴와 깊이 연관된 현상으로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
마이너문학의 향방을 생각할 때 프란츠 카프카의 「굴Der Bau」(1931)은 풍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 소설의 화자는 두더지와 비슷한 동물로 자신이 살 곳을 만들기 위해 지하에 굴을 파기 시작한다. 굴은 그에게 적으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한 장소이며 식량을 비축하기 위한 창고이기도 하다. 이른바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장소다. 하지만 그는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집이 이제 보이지 않는 적에게 습격을 받을지도 모르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믿어버린다.
“내가 굴 깊은 곳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사이에,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적은 어디
에서부터 이쪽을 향해 구멍을 파고 있다.”
(「굴」, 일본어 발표문 인용에서 번역. 이하 동일)
생존의 장소는 타자가 땅을 파는 소리에 벌벌 떨며 언제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불안한 장소로 빠르게 변한다. 땅속 깊숙이 몇 개로 분기된 갱도가 만들어진 굴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자. “굴을 만들었다. 꽤나 잘 만들어진 것 같다”고 소설 모두의 화자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굴은 그가 만들어낸 ‘작품’이기도 하다. 자신이 살 장소를 땅속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행위는 문학을 포함한 창작활동 그 자체로 간주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은 평상시에 보이지 않는 타자의 존재에 위협을 받으며 자신의 구멍을 파는 행위 자체도 애매하고 불명확하다는 의식에 사로잡히는 일 없이는 관철될 수 없는 행위이기도 하다.
소수자가 작품을 쓸 때 직면하는 상황을 이 소설은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보이지 않는 적은 누구인가. 그것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소리’로 표상돼 최후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불안함에 떨며 공포에 노출되면서도 우리는 “출구는 하나의 희망”이라고 믿으며 땅을 계속 파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카프카가 ‘굴’을 만드는 것의 불안정함과 불확실함을 작품 속에 그려낸 것처럼 마이너문학이 직면하고 있는 불가능성은 거꾸로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리라. 1923년에 나온 이 소설은 2019년 현재 (아니 지금이야말로) 유효하다. 구멍 속에 숨어살면서 화자는 중얼댄다.
“어쩌면 나는 다른 누군가의 굴속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상대방도 내가 땅을 파는 소리를 듣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굴은 혼자만의 장소가 아니다. 항상 보이지 않는 타자와 이웃하고 있다. ‘문학’이 설 곳이야말로 그곳이라고 단언해 본다.
현재 문학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이 서 있는 발밑에 비밀스러운 굴을 파고 들어가 어디에 도착할지 모르는 불안함에 떨면서도 ‘희망’이라는 출구를 갈구하는 과정이야말로 소중한 것이 아닌가. 우리 한 명 한 명이 만드는 굴은 어디에서인가 누군가가 파고 들어간 굴과 이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마이너문학의 위대한 작가들―카프카, 루쉰(魯迅), 산쉐(残雪), 조세희―이 파고 들어갔던 굴을 우리는 계속 파야 한다. 새로운 희망과 조우하리라는 꿈을 꾸면서.
# 이 글은 이하의 행사에서 사키하마 신 작가의 발표 원고를 번역한 글임을 밝힌다.
한중일 핫한 작가들 인천으로 모인다 < 문화종합 < 문화 < 기사본문 - 인천일보 (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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