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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문 안에서/연구와 번역

메도루마 슌 수상 소감문

by DoorsNwalls 2024.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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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이호철통일로문학상 (2023) 수상 소감문 

메도루마 슌


이호철 통일로 문학상을 제게 수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정위원을 비롯한 문학상 관계자 여러분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제 소설이나 평론을 번역 출판하여 한국어 독자들에게 전해 주신 선생님들과 출판사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저는 1960년에 오키나와 북부 나키진촌(今帰仁村)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오키나와는 아직 미군의 행정권 하에 있어서 어린 시절에는 미국 달러를 쓰며 생활했습니다. 농촌 지역인 것도 있어서 오키나와 고유의 생활습관, 문화, 언어, 자연이 풍부하게 남아있는 곳에서 고등학교 시절까지 보냈습니다.


한편으로 학교 교육은 일본 문부성(文部省) 산하에 있어서 TV나 영화, 학습지, 만화잡지 등을 경유해 일본문화도 들어왔습니다. 흑백TV 화면에 비치는 철완 아톰(鉄腕アトム)과 같은 애니메이션이나 울트라맨(ウルトラマン) 같은 특촬(特撮) 영상을 어린 시절의 저는 열심히 봤습니다. 


1972년 5월 15일에 오키나와의 시정권(施政権)이 일본에 반환되었습니다. 제가 소학교(小學校, 한국의 초등학교에 해당함) 6학년 때의 일입니다. 그 무렵 오키나와에서는 '일본복귀운동(日本復帰運動)'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 핵심 세력은 오키나와의 교직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미군의 압제 아래 놓여 있는 오키나와를 평화헌법 하에서 보호받는 일본으로 '복귀'시키는 것을 목표로 복귀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 가운데 오키나와의 언어·문화를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정책도 함께 진행됩니다.


제가 소학교에 다닐 무렵,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오키나와어 사용을 금지하는 '공통어(共通語) 준수'가 추진됐습니다. 오키나와어와 일본어라는 공통어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데, 영어와 독일어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언어학자도 있습니다. 오키나와어는 대다수의 일본인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서 편견과 차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오키나와전(沖縄戦) 당시에는 일본군에 의해 경계 대상이 되었고, 오키나와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스파이로 간주되었습니다.


전후(戰後)에도 편견과 차별은 사라지지 않고, 일본 '본토'로 일하러 간 오키나와인은 공통어를 능숙히 구사하지 못하면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런 것도 있어서 '공통어 장려'는 학교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에서도 이루어졌고, 생활습관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생활개선' 운동도 전개됐습니다.


제 아버지는 그런 풍조에 반기를 들고 집에서도 오키나와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조부모님과 삼대가 함께 사는 가정환경 덕분에 저는 나고 자란 지역의 언어인 오키나와어(나키진어)를 모어로 구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소설을 쓰는 데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


언어는 단순히 의사를 전달하는 도구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의 단어가 환기하는 이미지는 그 언어가 나온 지역 고유의 자연과 역사, 기억, 가족의 애정에 유지되고 있습니다. 학교 교육에서 배우는 일본어(공통어)보다 더 깊은 언어 경험으로, 가족과 지역사회에서 오키나와어(나키진어)를 모어로 품은 것은 제가 소설을 쓰는 힘의 원천이라고 믿습니다.

오키나와인이 자신의 모어인 오키나와어를 자기부정하게 된 것은 오키나와가 일본 제국의 식민지 지배하에 놓인 후부터였습니다. 원래 오키나와는 류큐국으로서 명나라·청나라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동중국해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살려 중계무역으로 번영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1879년, 일본 제국 메이지정부는 류큐국을 무력으로 위협해 국왕을 도쿄로 이주시켰습니다. 그 결과 류큐국은 해체돼 일본 제국에 병합되어 오키나와현이 되었습니다. 이후 일본은 타이완, 한반도, 남양군도, 중국 동북부까지 식민지 지배를 확장하는데, 그 시초가 된 사건입니다. 


 서구 열강을 따라잡기 위해 일본 제국은 근대화 정책을 강경하게 추진합니다. 학교에서는 국어 교육을 중심으로 공통어를 보급하고, 오키나와어를 금지하는 '방언패(方言札)'도 도입됐습니다. 오키나와어(오키나와 방언)를 쓴 학생은 벌로 '방언패'를 목에 걸어야만 했고, 다음에 오키나와어를 쓴 학생을 찾아 '방언패'를 건네줄 때까지 모욕을 계속 당했습니다. 그렇게 자신들의 조상 대대로 내려온 모어를 부정하고 열등감을 품게 하는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일본과 오키나와의 지배구조 하에서 진행된 '동화정책'이었고, 오키나와인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처럼 '동화정책'은 정치·경제 분야에 그치지 않고 언어와 문화, 오키나와 특유의 성씨와 이름, 여성들이 손등이나 손가락에 새기는 문신(파지치) 습관 등, 사회와 개인의 전 영역에 미칩니다. 오키나와인에게 근대화란 자신이 나고 자란 지역의 특성을 부정하고 도쿄를 중심으로 한 일본 '본토'를 모방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렇게 노력해도 일본 국내에서 오키나와인은 '2등 국민'으로서의 지위만을 얻을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일본 '본토'로 건너간 오키나와 사람들 중에는 편견과 차별을 두려워해 오키나와 특유의 성씨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고 오키나와 출신임을 숨기고 살았던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오키나와의 교사들이 오키나와어를 금지했던 것도 차별이 낳은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한 채 일본에 '복귀'='동화'하면 오키나와가 좋아질 것이라는 바람을 품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키나와전 이후, 일본 '본토'에서 떨어져나간 오키나와에서는 전쟁책임 추궁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전전・전중의 사상이 그대로 남았습니다. 한창 일할 나이의 남성 대부분이 오키나와전에서 죽어서 전쟁책임을 추궁해 공직에서 추방할 여유가 없었던 것도 그 배경에 있습니다.

올해는 1923년 3월 1일 발생한 관동대지진으로부터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관동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습격해온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등의 유언비어가 퍼져 수천 명 규모의 조선인 학살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기저에는 일본인의 조선인을 향한 차별이 있습니다. 평소 조선인을 차별하고 학대해 왔던 일본인은 혼란 속에서 앙갚음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차별의 반전(反轉)에서 오는 공포에 과민하게 반응한 민중은 존재하지 않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자경단을 조직해 조선인 적발과 학살에 나섰습니다.


그 과정에서 청각장애인이나 '공통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지방 출신도 희생되었는데 그 중에는 오키나와인도 있었습니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서 오키나와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일본 '본토'로 건너갔습니다. 오키나와섬 북부는 가난한 농촌 지역으로 많은 젊은 여성들이 본토의 방적 공장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제 친할머니도 그 중 한 명으로,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기 반년 전까지 가나가와현(神奈川県)에 있는 방적공장에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할머니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관동대지진 당시 오키나와 사람도 '공통어'를 능숙하게 말하지 못해서 조선인으로 의심받아 죽임을 당할 뻔했다. 그때 학교에서 배운 교육칙어와 역대 천황의 이름을 말함으로써 목숨을 건진 사람이 있다.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는 관동대지진 이후 오키나와로 돌아온 사람들이 마을에 전한 이야기입니다. 그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공통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면 큰일이 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관동대지진을 계기로 언어를 포함해 일본 '본토'에 대한 동화지향이 더욱 강해진 것은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조부모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일본 '본토'의 식당에 “조선인, 류큐인 사절”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방적공장 등 노동현장에서도 오키나와인들은 더 위험하고 건강을 해치는 작업을 강요받아서, 할아버지는 1920년대부터 30년대에 오사카에서 그런 류큐인 차별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어린 시절, 저희 집안은 3대가 함께 살았습니다. 조부모님, 부모님, 네 남매 이렇게 8인 가족입니다.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는 자신의 경험을 곧잘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1900년대 전반 오키나와의 상황이나 서민 생활, 일본 ‘본토’에서 오키나와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게 됐고 그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집 근처에 살던 외할머니는 가난 때문에 일곱 살 때 부락의 부자에게 팔려서 학교를 다니지 못했기에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습니다. 외할머니는 잠을 줄여가며 일해 돈을 벌어 열다섯 살 때 자기 힘으로 돈을 갚고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이후에도 고단한 삶이었습니다. 자녀 여섯 명 중 네 명은 어릴 때 죽었고 남편도 일찍 세상을 떠나서, 홀로 두 딸을 키워야만 했습니다.
그런 조부모님의 삶의 모습과 이야기에서 얻은 것이 제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점을 만들었습니다. 사회의 밑바닥에서 일하고, 헐떡이고, 괴롭고, 웃고, 울고,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민중의 시점으로 사회를 응시하고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해줬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도 같은 방식으로 소설을 만들어내는 시점을 얻었는데, 그것은 주로 전쟁체험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였습니다.
제 아버지는 1930년 9월 생으로, 1945년 오키나와전 당시에는 구제중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호철 작가는 1932년에 태어나 구제중학교를 다녔으니 일본군국주의 하에서 똑같이 엄한 교육을 받았을 겁니다.


오키나와전에서는 10대 소년부터 60대 이상의 노인까지 대부분의 남성이 즉시 전력으로 여겨져 중학생은 철혈근황대(鉄血勤皇隊)의 일원으로 전쟁에 동원되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당시 14살로, 2차 세계대전에서 총을 들고 전투에 참여한 가장 젊은 세대일 겁니다.


미군이 상륙하기 직전에 아버지와 다른 대원들은 해안선에 파놓은 구덩이에서 하룻밤을 보냈다고 합니다. 다음날 아침, 미군이 상륙해 오면 폭탄을 안고 적의 탱크에 몸을 부딪칠 예정이었습니다. 구덩이 안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본 아버지는 “아 내일 이맘때쯤이면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없겠구나……”라고 생각하며, 말로는 형언하기 어려운 마음이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다행히 미군이 다른 해안으로 상륙해서 아버지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 산간 지역에서 미군과 전투를 벌였고, 때로는 같은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하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전쟁 체험이나 어머니의 전쟁 체험을 어린 시절부터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오키나와전에서는 오키나와 주민 4명 중 1명이 희생되었다고 합니다. 1960년에 태어난 제가 유소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무렵, 주변 어른들은 모두 전쟁 체험자였고 일상생활 속에서 전쟁 체험을 이야기했습니다.


1979년 류큐대학에 입학한 후, 저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첫 단편소설은 할머니에게 들었던 오키나와전 체험을 바탕으로 한 내용입니다. 제 소설의 원천은 할머니와 할아버지, 부모님, 친척, 주위 어르신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체험이었기에 오키나와전이 소설의 주제가 되는 것은 필연적이었습니다.

1952년에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이 공포(公布)되면서 연합국의 일본 점령은 끝이 납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오키나와는 미군의 시정권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군은 '태평양의 요석(要石)'으로 오키나와 미군기지를 강화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그 사이 오키나와에서는 미군에 의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고 발생해 오키나와 주민들을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오키나와전이 끝난 후에도 오키나와는 미군의 지배하에 놓였고 주민은 전쟁과 이웃한 생활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군 병사에게 살해당하고 강간을 당해도 범인이 미국 본국으로 도망쳐버리면 재판도 이뤄지지 않습니다. 미군이 훈련 중 일으킨 사고로 사상(死傷)을 당해도 제대로 된 보상조차 없습니다. 베트남전쟁에서 다친 병사들은 오키나와에서 괴로운 기분을 전환하고, 술과 마약에 빠져 미친 듯이 날뜁니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여성들 중에는 밤거리에서 일하며 그런 미군을 상대하다 희생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과 함께 일본은 미국과 미일안전보장조약을 맺습니다. 군사와 외교를 미국에 의존함으로써 일본은 경제부흥에 집중할 수 있기에 1960년대에는 고도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한편 미일안보조약에 근거해 (일본 정부는) 기지를 제공하는 부담을 오키나와에 떠넘겼습니다. 그로 인해 미군기지가 집중된 오키나와와 일본 '본토' 사이에는 경제적, 정치적 측면에서 큰 격차가 생겼습니다.


지난 2022년은 오키나와의 시정권이 반환된 지 5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하지만 오키나와에 미군 기지가 집중되는 현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전체 면적의 1%도 채 되지 않는 오키나와에 미군 전용 시설의 70%가 집중돼 있습니다. 게다가 기지의 '정리 축소'를 핑계로 나고시(名護市) 헤노코(辺野古)에는 미 해병대의 새로운 기지가 건설되는 중입니다. 게다가 아마미오시마(奄美大島)부터 오키나와섬(沖縄島), 미야코섬(宮古諸島), 야에야마제도(八重山諸島), 요나구니섬(与那国島)에 자위대 기지가 건설되어 류큐열도 전체가 중국과 대치하는 최전선 군사 요새로서 강화되고 있습니다.


중국이 타이완을 군사적으로 침공할 위험성도 높아져 갑니다. 미일 양국 정부는 그런 식으로 위기를 부추기면서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자위대 기지를 강화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오키나와에서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섬이 다시 전쟁터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그 어느 때보다 커져 갑니다.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해 오키나와가 희생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1879년 일본에 병합된 후부터 오키나와전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일본 정부와 대다수 일본인이 품고 있는 오키나와에 대한 기본자세입니다. 힘의 차이가 큰 가운데 희생을 강요당하면서 끈질기게 저항해 온 것이 오키나와 민중의 역사입니다.

고향 마을을 떠나 제가 류큐대학에 입학한 것은 1979년으로 류큐국이 멸망하고 나서 100년을 맞이하고 있었던 때입니다. 당시 대학 캠퍼스는 과거 류큐 왕부가 있었던 슈리성(首里城)  터에 있었습니다. 슈리성은 오키나와전 때 미군의 공격을 받아 소실되었고, 1950년에 류큐열도미국 민정부(琉球列島米国民政府)에 의해 류큐대학이 건립되었습니다.


대학에 입학 후 2주일 쯤 지나 처음으로 반전 데모에 참여했습니다. 기동대의 탄압을 체험하고 분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후 오키나와 각 기지에서 진행되는 미군 훈련에 반대하는 지역 투쟁과 현민대회에 참여했고 학생자치회 활동도 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했습니다. 다음해인 1980년 5월에는 광주에서 민주화와 군사독재정권 타도를 내걸고 시민이 봉기해, 군에 의해 유혈 진압을 당했습니다.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오키나와 학생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같은 세대의 젊은이들이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고, 탄압받고, 죽임을 당하고 있었으니까요. 매일 뉴스를 접하면서 남의 일이라고만 여길 수 없었습니다.


오키나와에서도 광주 시민에 대한 탄압‧학살을 규탄하는 집회와 시위가 열렸습니다. 오키나와 미군기지는 동아시아 전역에 압력을 가하고 한국의 군사독재정권을 배후에서 지탱하는 역할을 합니다. 오키나와에서 벌이는 반전‧반기지 투쟁은 한국 민중과 연대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당시 학생이나 노동자, 시민은 그런 생각으로 데모와 항의집회에 참가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후로 40년 이상이 지났지만, 당시를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저도 이제 60대가 되었지만, 젊은 시절 받은 영향은 심대한 것 같습니다. 지난 40여 년 동안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반전‧반기지 운동에 쏟아왔습니다. 특히 지난 10수년은 헤노코 바다를 매립하는 신기지 건설과 다카에(高江) 숲에 헬리포트를 건설하는 공사에 반대하는 행동에 시간을 할애해 왔습니다. 미군기지 게이트 앞에서 항의 행동을 했던 것만이 아니라, 헤노코 바다에서는 카누를 탔고, 다카에 숲에서는 산 깊숙이 들어가 저지‧항의 시위를 계속했습니다. 


좀 더 책을 읽고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만,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의 자연이 파괴되고 새로운 군사기지가 건설되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보상이 거의 없는 시위를 묵묵히 이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저도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일상의 반복입니다.


앞으로도 오키나와에서 그렇게 살아가려 합니다. 도쿄나 오사카에 사는 사람들보다도 한국에서 미군 기지를 마주 대하고 사는 여러분이 오키나와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제가 이번에 이 상을 받게 된 것도 한국에 계신 여러분의 오키나와를 향한 이해와 애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에 감사드립니다.


동아시아의 정치‧군사 상황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오키나와 땅에서 노력하고 싶습니다. 오키나와를 둘러싼 동아시아 바다가 대립과 칸막이로서의 바다가 아니라, 사람과 문화를 잇는 바다가 되기를 희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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