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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문 안에서/연구와 번역

‘세계문학’으로서의 아시아문학-양석일과 무라카미 하루키

by DoorsNwalls 2024.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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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토시오 高橋敏夫 지음

다카하시 토시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세계문학인가요?”라는 질문을 몇 번이고 받은 적이 있다. 
인터뷰하는 측에서는 “그래요. 하루키 소설은 세계문학입니다.”라는 대답을 이끌어 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그렇다.”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에서 감독을 포함한 수명의 스텝이 ‘무라카미 하루키 추적(追跡)’이라는 영화작품 취재를 하러 와서는 나를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친구를 통해 해왔다.
“하루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코멘트 할 것 없다.”고 대답하자, 이전부터 하루키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평론을 쓰고 있는 것을 알고 있던 그 친구는, “하루키가 다녔던 대학을 찍고 싶은 모양이야. 그 안내만 해주지 그래.”라고 말해 왔다.
취재일 대학은 여름방학 마지막 주 휴일이었다. 대학 정문은 굳게 닫혀 있어서 감독이 기대했던 많은 대학생이 오가는 영상은 바랄 바가 못 됐다. 일본 내에서도 유수의 맘모스 대학이 뿜어내는 ‘혼잡’ 가운데서 하루키문학은 출현했다. 감독은 그러한 분위기를 잘 드러내는 영상을 찍고 싶었음이 분명하다. 

구름이 두툼하게 낮게 깔린 무더운 날이었다. 이따금 비가 내렸다. 땀을 닦아내고 비를 피하면서, 우리는 문학부 안을 잠시 걸었다. 하루키가 재학 중에 학교 안에서 목격하고 그리고 몇 작품 속에 야유 넘치는 필치로 그려내고 있는 학생들 간의 살인을 포함한 치열한 정치적 사건에 대해 나는 말했다. 그러나 감독은 그러한 화제에는 별로 흥미가 없는 것 같아보였다.

결국 연구실에서 인터뷰를 거의 진행하게 됐다. 감독의 말을 전하는 사람과 같은 질문을 몇 번이고 주고받았다. 감독이 바라는 대답과, 내 대답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소설은 세계문학인가?”라는 질문은 확실히 얼마 전에 하루키가 프란츠 카프카상을 수상하고 그 기세로 노벨상까지 받을지 모른다며 한바탕 소동을 피우던 시기였으므로 당연한 질문이었음이 틀림없다. 세계문학이기 때문에 세계적인 문학상을 수상했고 하루키를 연구하려고 세계 각 국에서 유학생이 찾아오는 대학의 연구실에서 하루키를 ‘추적’하려는 네덜란드인이, 하루키와 관련된 영상을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끝끝내, “그래요. 하루키 소설은 세계문학입니다.” 라고 말하지 못했다. 아니, 말할 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옳다. 

그것은 왜인가. 바로 그와 같은 시기에 나는 오랜 친구로 데뷔에서부터 현재의 문학적 성과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부를 보아온 양석일의 신작 <뉴욕 지하공화국>을 읽고, 홋카이도신문(北海道新聞)의 요청으로 서평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지면으로 인해 상당히 지워진 부분을 복원해 가면서 써보려 한다. 타이틀은 “차별과 빈곤과 전쟁을 응시하여, 세계문학의 한 페이지에 육박하다.”이다.

* 
9·11사건으로부터 5년.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부시의 ‘새로운 전쟁’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라고 하는 참혹한 ‘보이는 전장(戰場)’에 그치지 않고, 세계 도처에 감시와 밀고와 폭력 등이 동지와 적(칼 슈미트)을 만들어 내는 ‘보이지 않는 전장’을 확장하고 있다. 그 전쟁은 지금 전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애초에 그 사건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사건의 ‘진상’을 둘러싸고, 비행기가 다르다는 설, 트윈타워내부 폭파설로부터 시작해서 미국정부가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설까지, 드디어는 아메리카 군산복합체의 음모라는 등 사건에는 여전히 깊은 의혹이 드리워져 있다.
양석일의 대작 <뉴욕 지하공화국>은 9ㆍ11을 둘러싼 그러한 갖가지 견해와 정보를 종횡무진하게 구사하면서도, 사건의 ‘진상’보다는 그 ‘심층’에 육박하고 있다. 

양석일은 미국 사회의 현실을 파헤치는 소설 구상을 위해 뉴욕에서 체재하고 있다가 이 사건과 우연히 조우했다. 하지만 그에게 이 사건은 결코 돌발적이며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 사건은 미국 사회의 ‘밖’에서가 아니라 ‘내부’에서 엄습해 왔다.

맨하탄에서 한 발 밖으로 나서면 그 곳은 빈곤과 차별이 좀먹고 있는 세계였다.

포스트·냉전 이후 경제지상주의가 인종차별, 민족차별, 종교차별, 성차별을 더욱 가혹하게 만든 사회 ‘내부’는 그 모습 그대로 전지구의 축도에 다름 아니다.
사건을 풀기 위해서라도 “그러한 ‘내부’를 깊이 있게 추궁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양석일은 확신한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이 소설은 백인경관이 흑인청년에게 발포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후,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거리에 흘러넘치는 차별과 복수와 폭력에 이야기의 초점이 맞춰지며, ‘새로운 전쟁’에 파병되는 하층민 병사들이 그려진다. 그리고 마침내 귀환병이나 홈리스에 의해 조직된 체제파괴조직 ‘뉴욕 지하공화국’을 등장시킨다. 

사회의 이러한 내부모순에 비교해 보면 다른 한 편에서 눈부시도록 생생하게 묘사되는 정치적 속셈과 경제계의 욕망, 경찰과 군의 행동은 얼마나 표층적(表層的)이란 말인가.
“내게는 차별과 민족이라는 의식은 없다. 그러한 의식을 갖게 되면, 내 안의 여러 피가 웅성거리고 갈등하여, 몸에 이상이 일어나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진다.”라고 말하는 매력적인 등장인물 젬의 무참한 죽음은, 모순타파의 곤란과 함께 그러한 곤란이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전해준다.

사회적 편견과 차별, 힘든 삶과 빈곤 그리고 분쟁과 전쟁을 주시하여, 현재 존재하는 세계질서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공생적 질서를 원망(遠望)하는 것이 ‘세계문학’이라고 한다면 이 작품은 세계문학의 정상에 육박하는 걸작이라고 해도 좋다.


양석일의 소설을 ‘세계문학’이라고 한다면, 무라카미 하루키를 ‘세계문학’이라 할 수 없음은 매우 자명하다. 
일견 ‘세계문학’으로 오인하기 쉬운 무라카미 하루키의 ‘보편성’이라 함은, 고도자본주의가 양산해낸 도시문화의 ‘보편성’이며, 이는 극히 한정적인 의미의 ‘보편성’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차별이나 빈곤 등의 근대가 그 해소(解消)를 지향하는 ‘큰 이야기’가 무효화된 포스트모던한 도시문화의 ‘보편성’일 뿐이다.

양석일 선생님 자택에서 찍은 사진

 
하루키가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등장했을 때, 일본에서는 도시문화가 각광을 받기시작하고 있었다. 끝나가고 있는 모던과, 시작되고 있는 포스트모던의 틈에서, ‘상실감’과 ‘고독감’ 그리고 ‘부유감’ 속에 살아가는 주체들이 하루키 소설속 주인공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양석일 최초의 소설집 <택시광조국(狂躁曲)>이 출판된 것은, 하루키가 등장하고 2년 후인 1981년의 일이다. 「미주(迷走)」, 「신주쿠에서」, 「공동생활」, 「제사」, 「운하」, 「크레이지호스Ⅰ」, 「크레이지호스Ⅱ」 등의 단편 제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는 이질적인 소설세계가 연상될 것이다.

재일조선인 2세 주인공이 도쿄라는 첨단도시를 질주하는 택시드라이버라는 생업을 통해 체험한 현대 도시의 ‘지옥순례’가 단편집의 내용이다. 가혹한 노동과 빈곤, 민족차별과 성차별 그리고 상식과 질서를 거부하는 자에 대한 무시무시한 폭력이 행사된다. 이러한 것이 비등하는 곳에 직면한 주인공에게 하루키 작품에서 친숙한 ‘상실감’ㆍ‘고독감’ ㆍ‘부유감’ 등은 허락되지 않는다. 택시를 타고 놀러 다니는 젊은이들 일부에게서만 특권적으로 허용된 이러한 감각은, 양석일의 작품 속 주인공에게는 조금도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일본에서 버블경제의 붕괴와 현존하는 사회주의의 붕괴 등이 겹쳐지고 ‘전후’의 청산과 헌법 ‘개정’이 논의되기 시작한 1990년대 초반 이후, 포스트모던한 기분은 일소되었다. 지구적 차원의 ‘야만적인 자본주의’가 날뛰기 시작하여, 네그리와 하트에 의해 후일 <제국>과 연결되는 커다란 세계적인 권력 시스템이 등장하게 된다.

1995년, 커다란 사회적 사건들 가운데서 하루키는 논픽션 <언더그라운드>를 써서 근면한 ‘일본인’을 칭송하는 것으로 자신의 ‘망명(亡命)’을 끝냈다. 이러한 하루키의 ‘관계 맺지 않기’로부터 ‘관계 맺기’로의 변화는 그렇다 쳐도 이러한 전환은 그가 ‘일본과 일본인’으로 귀환한 최악의 ‘관계 맺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양석일에게는 하루키와 같은 선택지는 없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쪽을 향해 걸어 나가고자 하였다. 화려하고 경쾌한 도시문화 한복판에 유지되고 있는 편견과 차별, 지배와 권력, 빈곤과 힘든 삶, 분쟁과 전쟁을, 일본에서 아시아로 그리고 아시아에서 세계로 시야를 넓혀나갔다. 그러면서 그것을 뚜렷하게 응시하고 새로운 공생적 질서를 갈망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차별과 분단과 분쟁을 현대 세계의 ‘보편성’으로 파악한 후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주체를 발견하는 것은 현대사상에도 주목할 만한 것이다. 또한 세계문학에서도 주목할 만한 것임이 틀림없다. 나는 양석일이 지향하고 있는 방향에 현대사상과 문학의 가혹하고도 풍부한 가능성의 일단을 발견하게 된다.
 
# 이 글은 와세다대학 명예교수인 다카하시 토시오 교수가 10여년 전에 쓴 글을 번역한 것이다.  
 
## 얼마 전 타계하신 양석일 작가님의 명복을 빌며 포스팅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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