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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문 안에서/연구와 번역

로터스상 수상작가, 다테마쓰 와헤이의 AALA 참가 기록

by DoorsNwalls 2024. 9. 19.
다테마쓰 와헤이 ( 立松和平 )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서 삼백여명의 작가가 모이는 것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장관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진실이 숨어있다. 문학은 인간의 혼(魂)에 대한 것을 다루기에, 매우 다양한 현실과 그 속에서 갈고 닦여진 여러 혼이 존재한다. 그러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준 한국의 주최자 분들께 우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나는 일본인 작가중에서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에 참석한 마지막 세대에 해당한다. 1985년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에서 수여하는 <젊은 작가를 위한 로터스상>을 받은지 어느새 20년이 넘어간다. 당시 <로터스상>의 상품은 작가회의에 가맹된 국가 어디든 가서 여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정상 뒤로 미뤄둔 사이에,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와 함께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도 해산돼 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전주에서 열리는 <아시아/아프리카 문학페스티발>은 내게 남다른 행사였다.
 
현재, 세계 각지에서 강력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은, <경제의 세계화(economic globalization)>이다. 세계화(globalization)라고 하면 듣기에는 좋아 보이나, 그 실상이 미국형 자본주의 경제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 본질은 인간의 끝도 없는 욕망을 자극해서, 꼬리를 물고 새로운 소비를 생산해 나가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으므로, 그것을 잘 자극하면 새로운 제품은 얼마든지 시장에서 통하게 되어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핸드폰도 없었고, 컴퓨터도 없었다. 자가용차를 갖는 다는 것은 꿈속에서나 가능했다. 이러한 것을 손에 넣는 순간에는 언제든지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새 그 편리함에 완전히 빠져들어 도구에 불가한 것임에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되고 만다. 손에서 놓기는커녕 연이어 새로운 상품이 출현하게 되어, 그 때마다 상품의 노예가 되고 만다. 그 결과가 <지구환경문제>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나는 일본 국내를 여행하면서, 일본의 도시 모두가 균일화 된 인상을 받는다. 그렇게 된 것에는 <경제의 세계화>가 큰 몫을 하였다. 치열한 경쟁을 부르는 <국제표준화(global standard)>가 횡행하는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비용이 적게 들어가는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품질이 동일하다면 비용에서 경쟁력이 결정되게 되어 있다. 거기서부터 끝도 없는 비용경쟁이 시작하는 것이다.
 
최근 가격이 싼 제품은 모두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것들 뿐이다. 그 결과 <국제표준화>의 첨병인 대형마트에는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동일한 제품이 늘어서게 된다. 건물마저도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프레하브방식으로, 유닛의 조립방법이 다른 정도의 차가 있을 뿐, 모두 똑같아 지고 있다.
 
가게도 경제적인 합리성을 추구하게 되면서, 대형 매장에서 대량으로 판매하는 방식이 선호되고 있다. 거리의 영세상인들은 아무리 지역과 밀착해서 살아남으려고 해도 전국 체인을 가진 대형마트의 경제적인 합리성에 버티지 못하게 된다.

<대형>으로 하는 편이 유리하다면, 전국체인점보다 세계 체인점을 하는 편이 싼 물건을 갖추는데 유리하다. 그 결과 미국과 유럽에 본점을 둔 대형마트가 세계 각국에 체인점을 설치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일본의 지방도시 대부분은 도쿄와 오사카를 포함해 2차세계대전 말기에, 미국군의 초토화작전의 일환인 공습으로 도시가 소실된 것이 애당초의 원인이지만, 그 후 <경제 세계화>에 의해 대부분 같은 모양의 거리 풍경으로 돌변하게 되었다. 차안에서 잠시 잠이 들었다 깨어나 창 밖을 내다봤을 때 어디에 와 있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어디나 같은 풍경인 셈이다. 그리고 장래 그러한 영향은 점차 강해질 것이 틀림없다.
 
거리의 풍경은 인간의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각 나라의 거리 풍경, 아니 세계의 거리 풍경이 모두 같아지고 있다는 것을 과연 환영해야 할 것인가? 아무리 세상이 <국제표준화>로 치닫고 있다 하여도, 기후가 다르고, 각 나라마다 재배하는 작물도 다르지 않은가. 즉, 농업생산성도 다르게 마련이다. 풍토가 다르다 함은, 음식이 다름이요, 그로 인해 생활방식도 다름이요, 혼의 모양도 당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공통되는 부분이 앞으로 더욱더 많아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공통되는 부분이 많아지게 될수록 차이점은 그에 맞물려 더욱 귀중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부분에 문학의 사명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학은 어디까지나 혼의 영역을 다루는 것이다. 물질적인 욕망에 미쳐있는 인간 앞에, 문학은 아무런 힘도 미칠 수 없을 것이다. 혹은 그들의 머릿속에서 문학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화가 횡포를 더해가는 시대에, 확실히 문학은 지하수맥처럼 정열을 담수(湛水)하고 흐르고 있지 않은가. 손을 대지 않으면 언제든지 우물 속 물을 길을 수 있는 것처럼, 문학은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한 점을 힘차게 인식한 <아시아/아프리카 문학페스티발>이었다. 요즘과 같은 시대에 작가는 고립되어 가게 마련이지만, 지하수맥을 통해 얼굴을 마주보는 것은 기쁜 일이며, 격려가 됨을 느낄 따름이다.
 
# 이 글은 국내 잡지에 게재된 것을 블로그 용으로 재편집한 것임을 밝혀둔다. 
 


다테마쓰 와헤이(1947~2010)
「원뢰(遠雷)」로 노마 문예 신인상을 수상하였으며, 『독 - 풍문・타나카 쇼조』로 마이니치 출판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사회파 작품을 집필하는 한편, 국내외를 막론하고 다양한 곳을 왕성하게 방문하는 행동파 작가로도 알려졌다. 자연환경 보호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소설뿐만 아니라 기행문, 그림책, 희곡 등 순수문학 외에도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 다테마쓰 선생님과는 한국행에 동행했던 인연이 있다. 사흘 동안 술 한 모금 드시지 않고 강연 시간 외에는 호텔에서 창작 활동을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2010년 부고를 듣고 믿기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다테마쓰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