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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문 안에서/연구와 번역

오에 겐자부로 미래를 향해 왕복서간 2002년 2월 13일

by DoorsNwalls 2024. 9. 19.

 

오에겐자부로(大江健三郎)로부터 에드워드.W.사이드에(미래를 향해 왕복서간)

아사히신문 2002년 2월 13일 석간

 

새해 첫 날, 저는 미국과 이슬람의 젊은이들이 통신위성을 통해 토론하는 티비 프로그램에 출현해 동경에서 입회인을 맡게 되었습니다. 뉴욕에 있는 학생은 "가장 강하고 풍요로운 민주주의 국가"가 세계경찰로서 이행하는 역할에 대해 말했습니다. 뒤떨어진 '그들'에게 '우리들'의 민주주의를 전해준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하는 식입니다.

 

카이로의 여자 학생은 다양한 이슬람이 있음을 알맞게 제시하면서, 게다가 각자 품고 있는 미국에 대한 분노를 말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의심을 갖지 않는 달변가인 젊은이에게 미디어의 선전물인 책뿐만이 아니라, 사이드의 책을 읽도록 추천하기도 했습니다.

 

당신이 9.11 이후 집중적으로 써온 긴급하며 더욱이 본질적인 문장은 일본에서도 정리되어 《전쟁과 프로파간다(戦争とプロパガンダ)》라는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와 맞춰 작년 훌륭하게 번역된 《문화와 제국주의(文化と帝国主義)》가 읽히기를 저는 희망합니다.(두 권 다, 미스즈서방)

 

이미 잡종적(hybrid)이며, 이종혼교적(heterogeneous)이며 국경을 횡단하고 세분화되고 차별화된 문화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그 때 어떻게 미국 문화의 아이덴티티와 국가적 아이덴티티가 하나가 되어, 거대한 폭력과 손을 잡고,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인가? 당신은 그렇게 과제를 제시하였습니다. 그것은 걸프전쟁 직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아프칸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인은, 미국의 문화 제국주의에 희망과 불안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제 발로 그것에 흡수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이전까지의 재팬배싱(Japan bashing, 일본 때리기-역자 주)은 서구에서 사라졌으며, 혼미한 경제상태 가운데 고전하면서도 일본은 미국 정치와 문화의 일원성을 그대로 뒤따라가는 것을 21세기의 생존방식으로 삼은 것 같습니다. 일본은 재빨리 부시의 호전 노선에 전면적으로 참가를 표명하였고, 일본 헌법의 저항력을 조금씩 약하게 만든 수상은, 지금에 와서는 도리어 일본 국민에게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들」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타자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공감을 담아서, 대위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 새로운 일본의 젊은 세대가 나타나서, 미국과 일본에서 일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이상한 정치, 문화적 상황에 결코 동화되지 않는 지혜와 용기를 이 저작에서 받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경애하는 사이드 씨, 당신이 처음으로 일본에 왔었던 1995년 여름, 일본에 머물 때 유일한 공식적인 대화 상대였던 저는, 2년 전에 출판된 《문화와 제국주의》에 서명을 부탁했습니다. 그 이후 몇 번이고 만났지만 그 책이 제가 소설가로서 재생하는 실마리가 되었다는 것은 말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저는 소설 쓰는 것을 그만두겠다고 공표했습니다. 오직 책을 읽는 것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제 위기를 더욱 심각하게 한 것은, 생애에 걸친 친구이며 길동무였던 작곡가 다케미쓰 토오루(武滿徹)가 암으로 병상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오래 생각한 끝에, 소설을 일단 단념한 것은 제 작품이 출발했을 때 자세와 야심으로부터 멀어져서 개인적이며 게다가 신비주의적인 미로에 빠져있어, 이대로 계속 쓴다면 소설 자체가 왜곡된 신앙고백으로 흐를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1년 전 스톡홀름에서 상을 받은 것은 제게는 무거운 짐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젊었을 때는 언제나 다케미쓰 씨 앞에서 독백을 하고 있는 동안 '음악적'으로 어려운 문제점에 대해 단 하나 밖에 없는 해결과도 같은 정확한 지침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제 그러한 행복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한 궁지 속에서 《문화와 제국주의》를 읽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와 현실에 등을 돌리고 있는 제 자신에 대한 비판을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한 것인 동시에 이 책에 나타나 있는 기쁨에 넘치는 소설 독해로 갈증을 풀 수 있었던 것을 회상해 봅니다.

 

작곡가의 사후(死後), 저는 시간을 들여서 《다케미쓰 토오루의 일라보레이션(武滿徹のエラボレーション)》을 쓰고 재기하려고 했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소설 기법을 연마하는 것으로 다시 출발하자고 마음을 정했습니다. '공들인(elaborate)'이라는 단어만이 아니라, 사회에 발을 들여놓고 자립한 지식인의 삶의 방식, 그 윤리에 대해 당신다운 정의가 담긴 몇 가지 단어에 기대면서 말입니다.

 

지금 새롭게 일본어로 《문화와 제국주의》를 읽고, 거의 10년 전에 출판된 책이 바로 현재 일본, 일본인을 분석하고 있다는 것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인이 하고 있는 것은 걸프전쟁 시기에 미국을 뒤덮은 문화와 국민적 아이덴티티의 일원화, 즉 문화와 제국주의에―그것은 아프칸 전쟁을 통해 강조되고 반복되어 9.11이후, 더욱 지속되어 온 것이지만―바로 제 발로 나아가서 지배당하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슬람은 물론이고 다른 세계, 모든 것과의 일체화를 몽상하는 것입니다.

 

동경에서 열린 아프카니스탄 부흥지원 국제회의는 물론 중요한 동기부여를 하는 행사였지만, 일본 측 고관은―오가타 사다코(緒方貞子) 정부대표를 제외하고―파웰 미국 국무장관이 임석한 전승 축하회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의심스러운(dubious) 전쟁(battle)을 현지에서 보고왔던 NGO를 일시적이라도 외무성이 제외한 것은,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겠지요?

 

어두운 내용의 편지네요. 하지만 현재 저는 미일(米日)이 똘똘 뭉친 문화의 제국주의에 유효한 이의제기를 할 수 있는 존재로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타입의 젊은 지식인에게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NGO의, 또는 보다 작은 각각 자발적인 그룹의 통신 기능을 연마한 여성들, 아프칸전쟁의 기지로서 기능하고 있는 남방의 섬 오키나와(沖縄)에서, 본토 일본인에게는 잘 보이지 않게 된, '우리들'이 아닌 사람들을 통한 네트워크를 통해 다양하게 활로를 모색하려고 하는 젊은이들 말입니다.

 

만약 인류가 현재의, 잘 극복할지 명확하지 않은 위기를 넘어선다고 하고, 게다가 그것이 강대한 일국의 제국주의의―이미 문화라고 하는 정의를 보탤 필요가 없을 정도의 전체적인―솔하에 통합되는 것이 아닌 것으로, 21세기를 인간답게 인간이 살아 갈 수 있는 시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다양한 '그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 이 글은 모 잡지에 게재했던 내용을 블로그에 맞게 편집한 것임을 밝혀둔다. 다만 최종 게재본이 아니라서 초벌 번역을 약간 손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