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도시의 문 안에서/연구와 번역

잃어버린 '신념'은 되돌릴 수 없는가― 시마키 겐사쿠의 '전향문학'

by DoorsNwalls 2024. 9. 19.

 

 

시마키 겐사쿠의 '전향문학(轉向文學)'은 상반된 독해가 가능한 텍스트다. 즉, 잃어버린 '신념'을 되찾기 위한 필사적 분투기로, 혹은 '신념'을 방기한 후일담식 패배 기록으로 양분된 읽기를 시도할 수 있다. 1930년 전후 일본 좌파지식인의 옥중 전향선언은 공권력에 의해 사전 기획돼 신문지상을 메우고, 전향자들의 과거 유물이 된 '신념'은 대중 앞에 발가벗겨졌다.

 

출옥 후, 시마키는 도쿄대학 앞 혼고초(本郷町)에서 친형이 운영하던 책방에 병든 몸을 의탁하고 옥중 체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집필한다. 이 작품군으로 시마키는 당시 신인작가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다지게 되지만, 잃어버린 '신념'의 회복은 요원한 일이었다.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버려진 '신념'을 되찾기 위한 필사적 분투기를 써가지만, 독자들의 관심은 그가 겪은 '패배'와 극한 상황 쪽에 더 쏠렸다. 전향문학이 처한 곤란함은 내면적 '양심'이 외부의 힘에 꺾인 것을 설명하면 할수록 '패배의 기록'으로 받아들여지는 구조에 있다. 이미 변절했다고 선언된 자신의 '양심'을 스스로 변호해야 하는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시기 이후 시마키 문학은 시기별로 '전향문학'(1934-1937)과 '국책문학(國策文學)'(1937~1940년대 초반)으로 분류된다. 비록 시마키가 '농민운동'을 통한 사회변혁 노선을 방기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전향'은 "사상적 전환"(本田秋五『転向文学論』)을 의미하며, '전향문학'은 그러한 '전환'을 후일담으로 써낸 것만은 부정하기 힘들다. 외면적인 부분만 보자면, 그 안에 담고 있는 '진의'가 무엇이든 '전향문학'은 '사상적 패배'의 기록물로서만 '유통' 가능했으며 받아들여졌다. 비록 '전향문학'이 '국책문학'처럼 일본 국가(제국)가 수행하는 정책에 합치되는 문학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비약해서 말하면) 이 두 장르가 반제국주의적이라 하기는 어렵다.

 

 

시마키 문학의 '가능성'은 '국가' 권력의 통제와 억압에 대한 '고뇌'와 '갈등’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창작한 그 지점에 있다. 가장 엄혹한 시대 속에서 지키지 못했던 '신념', 그리고 그에 대한 자책과, 신념을 잃은 이후의 신념 되찾기의 불가능함, 그리고 그 이후의 좌절까지를 시마키 문학은 담고 있다. <살다>(1935.4)와 <재회>(1935.5)는 시마키가 전향에 대해 가장 첨예하게 고뇌하던 당시에 써진 것이다. 이 두 작품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시마키 겐사쿠의 결정적인 세 시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일). 폐병을 앓던 시마키 겐사쿠는 가마쿠라의 병실에서 생사와 싸우고 있었다. 그가 숨을 거둔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인 17일. 당시 가와바타 야스나리, 코바야시 히데오 등과 함께 병상을 지키던 구메 마사오는 그의 죽음을 <한 시대의 죽음(ひとつの時代の死)> (高見順『昭和文学盛衰史』)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그의 문학은 어두운 골짜기 시대(暗い谷間の時代)가 만들어낸 특이한(예외적) 작품으로 다뤄져 왔다.

 

2) 1937년 6월. 《재건(再建)》 단행본이 중앙공론(中央公論)에서 출판된 해, 시마키는 발매금지 후 불과 4개월 후 《생활의 탐구(生活の探求)》(河出書房 1937.10)를 내놓는다. 그는 《생활의 탐구》 시리즈로 당시 '내지문단'에서 최고 인기작가로 자리매김하지만, 이 작품으로 인해 '변절자(2차 전향)'라는 낙인이 찍힌다. 그 이후 시마키는 만주에 관한 기행문 등을 발표해 ‘국책문학’ 관련 작품을 여러 편 남긴다.

 

3) 1928년 3월 15일. 시마키는 일본농민조합 카가와(香川)현 연합회 유급서기로 일하다 이 날 전국적으로 실시된 공산당 및 그 조직 대검거 당시 체포된다. 다카마츠(高松)에서 오사카(大阪)형무소로 보내진 그는 각혈과 고혈이 계속되고 '발광'에 대한 공포로 1929년 전향 성명을 발표한다. 그 후, 독방 생활을 계속하다 1932년 3월 가석방으로 풀려난다. 시마키의 '전향문학'은 일본 제국이 전시 체제를 확립해 가며 좌파지식인들을 닥치는 대로 감옥에 잡아넣고 고문하던 시기, 4년에 걸친 '독방' 체험으로 탄생했다.

 

<살다>와 <재회>는 3)부터 2)까지를 아우르는 위치에 있는 작품이다. 시기상으로 보면 <살다>는 시마키가 체포돼 옥살이를 하던 1928년에서 1932년 사이를 시간 및 공간적 배경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재회>는 1932년 3월 가석방 이후에 대한 이야기로 농민운동을 지속하고자 하는 인물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 두 작품은 비록 등장인물명은 다르지만, 수감 중과 그 이후를 단편적이지만 이을 수 있어 연작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시마키의 '전향문학(轉向文學)'은 "어둡고 음침한 것들로 넘쳐나는 시대"(<재회> 중에서)에 대한 '체험'의 기록물이다. 그의 데뷔작인 동시에 출세작 <나병(癩)>(1934.4)은 <살다>보다 더욱 가혹한 상황, 즉 결핵이나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수용돼 "사회로부터 격리돼 잊힌 격리 병동 안에서 재 격리돼 완전히 망각된 세계" 속에서 '시각'이 벽으로 차단된 채, '소리'에

의지해 살아가야 하는 사상범 오오타(太田)의 고뇌를 그리고 있다. 오오타는 한센병에 걸린 옛 동지 오카다(岡田)가 "나는 지금까지 신념을 버리지 않았네"다고 말하는 것에 경외감을 품는다.

 

출옥 후, 시마키는 다시 '농촌' 속으로 뛰어들어 조직을 재건하고자 했는데, 그러한 모습은 <재회> 속에서도 확인된다.

 

“여기서 나가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농민운동을 할 걸세.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뿌리 깊게 대중 속으로 침잠 할 거네.”그는 몇 번이고 그것을 반복해서 말했다. (<재회> 중에서)

 

기무라 신키치가 '나'에게 말하는 이 작중 대화는 시마키 문학 가운데도 인상적인 한 부분이다. 농민운동을 통해 일본공산당 활동을 시작한 후 체포된 그가, 전향 후에도 다시 농민운동으로 돌아가겠노라고 기무라를 통해 말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2)에서 1)에 이르는 시기에 쓰여진 시마키의 국책문학은 그의 전향문학에 나타난 자기 '재건'을 위한 몸부림침까지도 사장시켜 버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물론 이 두 작품은 픽션인 이상 모든 것을 작가와 연관해서 살펴볼 필요는 없지만, 작품 자체가 당시 '사실'로서 독자들에게 읽혔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살다>에서 “마음을 굳게 드세요. 시마키 씨. 꼭 살아서 나가야 합니다.” 하고 말하던 나이토의 말이나, <재회> 끝에 붙어있는 "4월 10일"이라고 정확히 지정된 날자는 이 두 작품이 저자를 둘러싼 '사실(전향)'을 독자들에게 어필했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이른바 수감 체험기와 수감 이후 삶을 소설이라는 장르를 빌려 형상화 하고 있을 뿐, 독자들에게 이 소설은 시마키가 쓴 절절한 전향자의 고뇌를 담은 '사실'로 읽혔을 것이 분명하다. 이 '사실'성은 시마키가 당대 인기 작가가 된 결정적인 요소가 됐지만, 전후 그의 문학이 일본문학사 안에서 예외적(불가능한) 지점에 위치된 이유가 됐다. 후쿠다 기요토(福田清人)는 시마키 문학의 불가능성(예외성)만이 두드러진 이유에 대해 작가가 시대와 거리 유지에 실패한 것을 최대 요인으로 꼽고 있다.

 

시마키 문학을 여전히 예외적 위치에 놓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여기서 내릴 수는 없다. 다만, 시마키 문학은 시대의 억압(검열)과 좌절(전향)이라는 지금도 유효한 모럴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의 텍스트를 마주하며 해결 불가능성 속에서 가능성을 찾아내려는 시도는 '과거'를 단순히 '저곳'에서 예외적으로 벌어졌던 일들로 치부하지 않고, '현재' '이곳'의 문제로 환원해서 사유할 때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 이 글은 모 잡지에 게재했던 내용을 블로그에 맞게 편집한 것임을 밝혀둔다. <살다>와 <재회>는 한국어로 번역했으나 여러 이유로 블로그에는 업로드하지 않을 예정이다.

 

시마키 겐사쿠島木健作(1903.5.7.~1945.8.17).

본명은 아사쿠라 기쿠오(朝倉菊雄) 홋카이도 삿포로시 출생. 1905년 아버지가 중국 대련에서 병사. 가세가 기울어서 15살인 고등소학교 시절부터 홋카이도 탁식은행에서 급사를 했으며, 그 후 두 차례에 걸쳐 도쿄로 상경해서 서생 생활을 시도하지만 전부 실패한다. 17세인 1920년부터 각혈이 시작돼 병세가 평생 그를 따라다니게 된다. 특히, 1923년 관동대진재 당시 근무하던 제국전등주식회사에서 무너진 건물 잔해에 깔려서 중상을 입었다. 1925년부터는 동북제대 법학부 선과에 입학하지만, 이듬해 학업을 버리고 시코쿠로 넘어가 일본농민조합 카가와현 연합회 유급서기로 농민 실천운동에 돌입한다. 1934년 <나병(癩)>을 『문학평론(文學評論)』 4월호에 발표해 일약 전향문학을 이끄는 인기작가가 된다. 1939년 이후 국책의 노선에 따라 조선을 거쳐 만주를 탐방하고 여행기 등을 다수 집필한다. 일본의 패전직전까지 작품 활동을 계속하지만 폐병이 점점 심해져 일본이 패전 한 이틀 후인 1945년 8월 17일 가마쿠라 양생원에서 숨을 거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