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근 일 년간 일본 현대문학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은 호러소설의 출현이다. 요시모토 바나나(吉本ばなな),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변함없는 활약, 에쿠니 가오리(江国香織)나 가와카미 히로미(川上弘美) 등의 연애소설은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지만, 호러소설 붐은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일본 독자에게도 호러소설 붐이 갖는 의의가 충분하게 알려져 있다고는 보기 힘들 것이다. 나는 보통 무시무시하고 불필요한 소설이라고 생각되기 쉬운 ‘호러소설’이야말로 이 시대의 <문학적 희망> 가운데 하나라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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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horror)라 함은 ‘공포(恐怖)’이며, 테러(terror)가 사람들에게 안겨주는 ‘두려움’에 반해서, 생리적인 혐오감에서 오는 ‘무시무시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두려움’이 자신을 넘어선 외부를 향한 공포라는 것에 비해 ‘무시무시함’은 자신을 포함한 내부의 공포이다. 호러는 외부를 상실한 시대의 공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호러소설을 싫어하는 사람은 무서운 것을 싫어한다고 하기 보다는, ‘공포의 연쇄’를 믿지 못하거나 거짓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확실히 호러소설은 연애소설에서 언제 어디서든 연애만이 일어나고(발생하고), 경제소설에서 사람들이 가혹한 경제흐름에 일방적으로 희생되고, 미스터리에서 모든 조각이 거대한 ‘수수께끼’에 의해 긴박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공포가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그러한 것은 일상에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상을 잘 들여다보라. 전혀 있을 수 없다고는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어렴풋이, 쥐 죽은 듯이 공포를 유발하는 사건은 일상 여기저기에 자리잡고 있다. 호러소설은 이러한 경미한 징조 혹은 흔적을 극대화한다. 연애소설이 ‘연애’를 경제소설이 ‘경제’를 극대화하는 것처럼. 나는 그것을 <극대화의 방법>, <극단화의 방법> 혹은 <전경화의 방법>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 방법으로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공포를 주시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SF가 정말로 기묘하게 작동되는 순간, 그것은 낯선 것을 익숙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들을 여행에 동반시켜, 거기에서 우리는 낯선것과 조우하며, 그 낯선 것이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된다”(R.스콜즈). 이것은 호러소설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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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호러소설’이라는 단어자체가 정착하게 된 것은, 1993년 이후이다. 그 전까지는 ‘기괴소설(奇怪小說)’ ‘괴담(怪談)’이라는 오래전 유령에 관한 이야기를 의미하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물론 ‘호러’는 미국의 호러영화를 의미했다. 1993년에 대형출판사와 티비가 ‘일본호러 소설대상’이라는 문학상을 설정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 때까지 일본에는 없다고 생각되던 ‘호러소설’이 잇달아 등장하게 되었다. 반도 마사코(坂東眞砂子), 시노다 세쓰코(篠田節子), 온다 리쿠(恩田陸), 오노 후유미(小野不由美)등의 여성작가가 등장하게 된다.
이 시기는, 미증유의 머니게임(money-game)으로 들끓던 버블경제(1896~1992년) 붕괴시기로, 또한 현존했던 사회주의의 대붕괴가 일어났던 시기였다. 종래의 거대한 ‘해결’에 대한 환상이 두 방향으로 무너져 버렸다. 이러한 <붕괴>는, 정치, 경제의 기능불능으로부터, 급작스레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붕괴>를 향해 퍼져나갔다. 연이어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음에도,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한 채 문제가 겹쳐지고, 부풀어 올라 결국에는 풍선이 펑하고 터지는 것처럼 내부파열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해결불가능성으로 인한 내부파열의 시대>에, 호러소설은 등장하게 되었다. 일본이 ‘재팬 애즈 넘버 원(Japan As Number One)’에 취해 정신을 놓고 있을 무렵, 베트남전쟁후 사회적 혼란과 경제불황이 거듭되던 무렵 미국에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호러가, 그 중심을 버블붕괴후의 일본으로 옮겨온 셈이 될 것인가.
경제 주역의 교체가 호러의 중요 무대를 교체한 것과 정확하게 겹쳐진다. 최근 30년간의 미국과 일본에 한정해서 보자면, 호러는 사회의 암부(暗部)에 달라붙은 ‘죽음의 신’처럼 보인다. 단순히 달라붙어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여러가지 ‘문제’를 폭로하고, ‘공포’를 부추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 터무니 없이 건강한 ‘죽음의 신’. 당신은 이것을 사회질서의 공포로 부터 '무덤을 파는 자’라고 바꿔 불러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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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세나 히데아키(瀬名秀明)의 바이오호러 걸작 ≪파라사이트 이브(パラサイト・イブ)≫가 출현하였고, 다음 해 기시 유스케(貴志祐介)가, 고베대지진후 도심에서 초능력 여성과 다중인격장애를 갖은 소녀가 조우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컬트호러 ≪ISORA≫가 등장하게 된다.
한 개의 저주받은 비디오테이프가 수수께기의 참극을 불러오는 ≪링≫을 발표했던 스즈키 고지(鈴木光司)는, 속편≪라센≫으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죽은 여자의 원념(怨念)과 염력 등의 오컬트호러는, DNA를 둘러싼 바이오호러로 전개되었다. 3부작 완결편인≪루프≫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 네트워크 세계에서 펼쳐지는 사이언스호러 스토리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9년에는 이와이 시마코(岩井志麻子)가 ≪봇케 교텐(ぼっけえ、きょうてえ)≫를 쓰면서 등장하게 된다. ≪봇케 교텐(ぼっけえ、きょうてえ)≫은, 오카야마(岡山) 방언으로 ‘정말 무섭다’는 의미이다. 청일전쟁이후의 사회를 무대로 '밝고 폭력적인 근대'에 등을 돌리고 참혹한 것을 스스로 선택하는 주인공을 그린 작품이다.
이러한 호러소설가들은 연이어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책을 찾아내지 않은 채 문제가 겹쳐지고, 부풀어 결국에는 내부파열하는 사회와 인간을 집요하게 그리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해결불가능성에 의한 내부파열>를 그리는 것은, 호러소설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고베(神戸)에서 중학생이 연쇄살상사건을 일으킨 것과 그 연재시기가 겹쳐있는≪미소소프(インザ・ミソスープ)≫에서, 무라카미 류는 이전에는 보여주지 않았던 이상할 정도의 열정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돼 버리는” 남자의 집요한 참살장면을 쓰고 있다. 또 재치 가득한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작가, 기리노 나쓰오(桐野夏生)는 ≪아웃(OUT)≫에서, 각기 음울한 환경에 갇혀진 주부들이 욕실에서 시체를 잘라는 장면을 극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 어느 것도 처참한 장면이지만 일종의 해결감이 감도는 것은, 피로 범벅된 묘사가, <해결불가능성에 의한 내부파열>라고 하는 사태에 도달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적 세계화(globalization)의 맹위가 사람들을 덮치고 <해결불가능성에 의한 내부파열>를 한층 심각한 것으로 만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화 되어가는 정치가 내셔널리즘(nationalism)를 고무하기 시작한 이 시기에, 이러한 <건전함>이나 <국민적 일체감>이, 어떠한 <해결>도 가져다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호러소설은 폭로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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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부터 연극활동을 개시한 나가쓰카 게이시(長塚圭史, 1976년 출생)는 호러소설의 새로운 시도를 개시한 시점에서 출발한 극작가이다.
2004년 ≪일하는 사내(はたらくおとこ)≫의 마지막에는 믿기 어려운 장면이 등장한다. 무대 한가운데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산업폐기물을, 달리 버릴 곳이 없다고 체념한 사장과 공장원들이 일심 불란으로 먹기 시작한다. 검고, 질척질척하고, 끈적끈적하고, 흐물흐물한 폐기물을 손으로 건져내서 연이서서 입속에 넣는다. 순식간에 두 사람은 폐기물 범벅이 돼서, 사람이 폐기물을 먹고 있는 것인지 폐기물이 사람을 먹고 있는 것인지 판연치 않게 된다. 연기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무시무시하고 그로테스크한 장면이다.
하지만 이 장면을 접하면서도 내 안에서는 기분이 나빠지는 것과 동시에 어떤 종류의 해방감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연기를 하고 있는 연기자의 표정에도, 어두컴컴한 무대에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 관객의 자세에도, 간신히 여기까지 당도했다는 일종의 안도감이 감돌고, 수상쩍은 웃음조차 일으키는 그 앞에는, 한 줄기 빛이 보이고 있다……….
아내의 죽음, 사업실패, 다액의 빚, 망해버린 공장, 일감이 없는 공장직원들, 정신병에 힘들어하는 사람들, 그리고 사용금지 농양의 유포, 황폐해진 지역, 일그러져버린 인간관계――이러한 <붕괴>의 연속 위에, 무대에 전개되는 악조건이 연속적으로 합쳐져, 결국 맞이한 마지막인 것이다.
이 이상 있을 수 없는 악조건을 피하지 않고, 직시하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가는 사람들이, 어둡게 빛나지 않을 수 없다. 헤겔 풍으로 말하자면, 우리들은 악조건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악조건 속에서 단지 그것을 통해서만이 해방되는 것이다.
이러한 악조건을 떠안고 개진해 나간 나가쓰카 게이시의 연극이 <나가쓰카노아르>라고 불리우게 된 점은 당연한 것이리라. 나가쓰카 이전의 연극 세대가 붕괴에 직면하여, 이른바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꼼작도 못하게 된 것을 곁눈으로, 나가쓰카는 붕괴 그 시점부터 목도했던 것이다. 그는 <붕괴>로부터 눈부시게 출발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더욱 깊어지고 어둠을 더해가는 <붕괴의 시대>로 부터, 그 어두운 양분을 가득 빨아들인 <나가쓰카노아르>는 동시대의 호러 및 판타지 가운데 최고의 능선을 찾으며, 그로테스크와 에로티시즘과 블랙유머를 찬연하게 빛나게 하고 있다.
그 뿐이 아니다. <나가쓰카노아르>는, 그로테스크와 에로티시즘과 블랙유머라고 하는, <붕괴의 시대> 특유의 경향을 순화하는 것과 함께, 그것을 다른 것으로 전유해 가는 의지를 관철시키고 있다. 나가쓰카 게이시가 항상, 윤곽이 확실한 <스토리>에 우직하리만치 구애받는 것은 그러한 전환을 가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나가쓰카노아르>는 <붕괴>의 시대에 죽음으로부터 재생으로 향하는 강인하고 굽힘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나가쓰카 게이시의 시도야 말로, 호러소설을 그 대로 <희망>으로 전환하는 시도의 하나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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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11을 계기로 시작된 <새로운 전쟁>의 시대, <테러와의 전쟁>을 모토로 일본은 <전쟁이 가능한 국가>를 향해 달리기 시작하고 있다. <아름다운 나라>나 <품격있는 국가>라는 말을 유포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러나, 호러소설만이 아니라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그리고 영화에도 호러는 더욱 증식 하고 있는 중이다. 그 모든 것이 비추고 있는 사회와 인간의 <해결불가능성에 의한 내부파열>은 <아름다운 나라>나 <품격있는 국가>가 도달한 지점에 <붕괴>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붕괴>에서 눈을 돌리고, <전쟁이 가능한 국가>를 향해 질주해간다면, <붕괴>는 사회전체로 퍼져나갈 것이다. 호러는 그러한 경고로서, 이 시대의 <문학적 희망>이 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이 글은 모 잡지에 게재했던 내용을 블로그에 맞게 편집한 것임을 밝혀둔다. 다만 최종 게재본이 아니라서 초벌 번역을 약간 손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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