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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문 안에서/연구와 번역

오키나와문학에서 배운다 / 다카하시 토시오

by DoorsNwalls 2024. 9. 19.

다카하시 토시오

 

 

'아이누 문학'과 '오키나와 문학'의 등장

 

<신조일본문학소사전(新潮日本文学小辞典)>은 1968년에 출판됐다. 1932년에 <일본문학대사전(日本文学大辞典)>을 간행하고, 전후(패전이후, 역자주) 그 증보판 및 축쇄판을 출판한 신조사(新潮社)가,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주목해서 전혀 새로운 문학사전의 출판"을 계획한 것이다.

 

1968년은 베트남 반전운동과 새로운 다양한 사회운동이 결합하여 전후적인 가치와 체제질서에 의문을 던지고, 미증유한 사회적 동란이 시작된 시기였다.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는 말할 것도 없이, 가이코 다케시(開高健), 시바타 쇼(柴田翔), 마쓰기 노부히코(真継伸彦), 다카하시 가즈미(高橋和巳) 등을 비롯해 문학에 새로운 기운을 불러온 작가들이 즐비한 <신조일본문학소사전>은 확실히 이 시기에 딱 들어맞는 새로운 문학사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사전에는 오키나와 현대문학이 전혀 기술되어 있지 않다.

 

"오키나와 문학은 불모지인가(좌담회 제목)"라는 자극적이며 도발적인 제목을 내걸고 <신오키나와문학(新沖縄文学)>이 창간된 것이 1966년이다. 이 잡지 제 4호에 게재된 오시로 다쓰히로(大城立裕)의 <칵테일파티(カクテル・パーティー)>가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것이 다음 해인 1967년이다. 이 소사전에는 야마노구치 바쿠(山之口貘)는 있어도, 아직 오시로 다쓰히로와 나가도 에이키치(長堂英吉), 치넨 에이키(知念栄喜), 기요타 마사노부(清田政信), 가와미쓰 신이치(川満信一) 등의 이름은 없다.

 

하지만 오키나와가 ‘본토로 복귀’된 시기를 거쳐, 1988년 출판된 <증보개정 신조일본문학소사전(增補改訂新潮日本文学小辞典)>에는 ‘오키나와 문학’이라는 항목이, ‘아이누 문학’과 한 쌍을 이루는 형태로 새롭게 추가되었다. 필자는 전자가 호카마 슈젠(外間守善), 후자가 나카가와 히로시(中川裕)이다.

 

나는 당시 복잡한 심정으로 이 두 카테고리를 접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은 단일민족이다"라는 무지와 오인을 훨씬 뛰어넘는 제국주의적인 방만함이 두드러지는 말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문화환경이 일본에 조성되었다는 문학적 현상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누 문학'과 '오키나와 문학'의 등장은 환영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포스트모던이 조성한 상황이라는 것이, 설사 이전 사회질서의 고도자본주의적인 재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분단되고, 억압받고, 소거에 가까운 처우를 받았던 선주민족, 소수민족, 마이너리티가, 다양한 영역과 상황 속에서 부상(浮上)하는 것을 저지하지 않은 것은 확실한 것이리라. 그러나

 

'자립'이라는 구조

 

"그러나"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부상은 좋다고 해도, 문제는 부상이 어떻게 기존의 사회질서에 받아들여졌는지, 혹은 그것이 기존의 질서를 어디까지 변경시켰느냐 하는 점이다.

 

'아이누 문학'과 '오키나와 문학'의 등장은 사전전체의 방향성을 변경했다고 하기 보다는, 일본문학 사전 가운데 '아이누 문학' '오키나와 문학'이 본의든 타의든 자신의 위치를 확보했다는 것, 게다가 억지로 그렇게 됐다고 하는 편이 맞지 않겠는가.

억지로 편입시켰다는 인상은 우선, '일본문학'과 '아이누 문학' '오키나와 문학'의 관계가 확실하지 않다는 점과 관련된다.

 

'오키나와 문학' 파트에서 호카마 슈젠은 오키나와의 고대문학(古代文學)을 "일본문학사 속에 그대로 위치 짓는 것은 어렵다"라고 쓰고 있으며, '본토문학'과의 차이점을 언급한 위에, "갑작스럽게 서정문학으로부터 출발한 일본문학사를 보충하는 것으로서 주목하고 싶다"라고 쓰고 있다. 차이를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보완에 이르기까지의 서술은, 아마도 '일본문학' 안에 '오키나와 문학'을 억지로 편성한 사전의 힘이 반영된 것이리라. 그렇다고 해도 그 사실은 '오키나와 문학'의 등장이 '본토문학'을 불가피하게 소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사전에 '본토문학'이라는 항목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키나와문학선

 

'본토문학'없는 '오키나와 문학' 다시 말하자면 '야마토 문학(ヤマト文学)' 없는 '오키나와 문학(オキナワ文学), 일본문학 없는 아이누 문학, 이러한 것을 둘러싸는 다재다능하고, 만사형통한 '일본문학', 이것이야말로 <증보개정 신조일본문학소사전>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지배하는 것이 '투명'하고, 지배당하는 것이 특이한 것으로 표상된다고 한다면, 사전에 등장한 '아이누 문학' '오키나와 문학'은, 지배로부터 '자립'했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편성한 장치인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야마토’는 일본의 본토가 갖고 있는 ‘제국주의적 지향성’을 나타내는 말이며, ‘본토’의 상징이다. ‘일본’이라는 말속에는 ‘오키나와’ 및 ‘아이누’와의 관계성이 일국주의적인 사관성에 수렴돼 버리는 경향이 있다. 필자가 ‘일본’ 대신 ‘야마토’라는 단어를 선택하고 있는 것은 ‘일본’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추상성을 피하고 ‘본토’와 ‘외지’의 관계성을 확실히 정립하기 위한 시도이자 인식이다. (역자 주)

 

이보시 호쿠토

 

문제가 한층 심각해지는 것은, 두 항목에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삼은 기술이 염려스러울 정도로 희박하다는 점이다. '오키나와 문학'은 사전 전체 구성의 거의 1할을 차지한다. '아이누 문학'에 이르러서는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한 기술은 거의 없다. 이보시 호쿠토(違星北斗), 바체라 야에코(バチェラー・八重子), 모리다케 다케이치(森竹竹市), 하토자와 사미오(鳩沢佐美夫) 등의 노력은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으며, 근현대 아이누 문학이 쇠락했다고 하기 보다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기술방식이다.

바체라 야에코

 

'오키나와 문학'에도 오시로 다쓰히로의 이름이 나온 것뿐으로, 히가시 미네오(東峰夫), 마타요시 에이키(又吉栄喜), 치넨 세신(知念正真) 등이 시도한 문학적 도전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렇게 '현재' 시점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아이누 문학’과 ‘오키나와 문학’을 사전에 편입시킨 것이 갖는 의의 및 문제에 대해 관심(인식)이 그렇게 높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음에 틀림없다.

 

필자가 '오키나와 문학(沖縄文学)'을 종종 '오키나와 문학(オキナワ文学)'으로 표기하는 것은 '야마토 문학'과의 대립, 저항, 혹은 공동투쟁을 의식하기 위함에서이다. 그러므로 '沖縄文学'과 'オキナワ文学'간의 대립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오키나와(沖縄)'라고 하는 표기에 나타나 있는 역사적인 피구속성, 부자유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지배문화(문학)를 투명하게 드러내고, 피지배문화(문학)를 현재성이 결여된 형태로 노출하는 것, 이것은 그대로 포스트모던이라는 상황하의 마이너리티의 부상과 지배질서로의 편입이라는 현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1988년 <증보개정 신조일본문학소사전>을 손에 들고, '아이누 문학' 및 '오키나와 문학' 카테고리를 읽었을 때 들었던 복잡한 기분을 지금 쓰자면 대강 위와 같다.

 

부정적인 견해를 갖지 않을 수 없었던 '아이누 문학' '오키나와 문학'의 등장 방식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아이누 문학은 다음 기회에 자세히 쓰고 싶다). 이는 그러한 것을 접하는 내 야마토성(ヤマト性)을 의식화 하는 문제와 겹쳐지는 동시에, 지금까지 내가 시도해온 지배질서와의 내부적 투쟁을 한 발 더 나아가 의식화시켜 나가는 문제와 겹쳐졌다.

 

새로운 필자의 연이은 등장과 오키나와 문학의 전성기

 

나는 <칵테일 파티>와 <오키나와의 소년(オキナワの少年)>, <인류관(人類館)>, 및 <긴네무 집(ギンネム屋敷)>등을 재독하였고, 이라하 모리오(伊良波盛男), 요나하 미키오(与那覇幹夫), 다카라 벤(高良勉) 등의 시집을 다시 손에 들었다. 또한 1990년부터 간행된 <오키나와문학전집(沖縄文学全集)>(국서간행회)을 펼쳐들고, 오카모토 게이토쿠(岡本恵徳) 및 나카호도 마사노리(仲程昌徳) 등의 근현대 오키나와문학연구를 숙독했다. <신오키나와문학(新沖縄文学)>의 충실한 내용에는 언제나 경탄해 마지않았으며, 또한 연이어 등장한 오키나와 문학을 이끌고 갈 새로운 작가들의 뛰어난 시도에도 매혹되었다.

 

95호까지 이어진 <신오키나와문학(新沖縄文学)>의 휴간(1993년)은 정말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신오키나와문학>은 확실히 오키나와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전후를 대표하는 문화적 풍부함과 전투성을 두루 갖추고 있던 잡지중 하나였다.

 

이는 1970년대 후반 구로다 기오(黒田喜夫)의 추천으로 한 때 관심을 가졌었지만 어째서인지 오랫동안 멀어져 있던 오키나와 문학과의 재회였으며, '오키나와 문학'이라는 거대하고 매력적인 대상과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만남이었다.

 

신오키나와문학

 

나는 이러한 오키나와 문학이 축적한 역사와 현재 전개하고 있는 활동이 <증보개정 신조일본문학소사전>과 같은, 자기 입맛에 맞는 편성을 거부하고 있음을 알았다. 거꾸로 보자면, 그러한 편성을 믿고 있는 것은 기실 ‘야마토 문학’ 밖에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모던이라는 갑옷은 물론, 포스트모던이라는 간편한 옷차림이 된 후에 야마토는 스스로를 지배문화로 더욱 확고히 자리매김 하려하고 있다. 게다가, 탈냉전시대로 돌입한 야마토는 이미 포스트모던이라는 간편한 옷을 벗어 던지고, 과거 모던시대에 장착하고 있던 갑옷보다 한층 거창한 '국민국가' 재편시대의 갑주(甲冑)를 몸에 두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실감한 것은 야마토 내부에서 보다는, 일본이라는 국민국가의 폭력을 가장 잘 드러내는 최전선기지임과 함께 사회적 제반 문제가 첨예하게 드러나는 장소인 오키나와에서야말로 명징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아라사키 모리테루

 

1995년에는 "동서냉전의 종언에 의해, 그 역할이 끝났던 것으로 보였던 미일안보체제를 새롭게 정의하는 것과 함께 확대 강화해 가려는 시도"가 뚜렷해지면서, "안보의 확대, 강화는 그대로 오키나와 기지의 유지, 확대, 강화를 불러오는 방향으로 전개됐다."(아라사키 모리테루(新崎盛暉)『오키나와현대사(沖縄現代史)』) 같은 해 9월 일어난 미국병사가 저지른 소녀폭행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오키나와 현실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전후 역사상 3번째로 큰 민중운동의 파도(상동)"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 재편 움직임 속에서, '국민국가' 재편성을 진행하는 일본, 야마토, 미국, 오키나와의 보안(保安)세력을 공격했다.

 

폐쇄와 내부파열을 향해 항진(亢進)해 가는 야마토의 문학과는 대척된 지점에 있는 오키나와 문학이 다시 각광을 받고, 1996년에 마타요시 에이키(又吉栄喜), 1997년에는 메도루마 슌(目取真俊)이 연이어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나가도 에이키치, 고하마 기요시(小浜清志), 사키야마 다미(崎山多美), 이케가미 에이치(池上栄一)등의 활약도 한층 두드러져 보였다.

 

이러한 자각을 바탕으로 작가들의 지속적인 활약상을 보자면, 오키나와 문학(オキナワ文学)의 상황은 오키나와 그 자체의 문제라고 하기보다는, 그러한 폭발적인 현상을 결과로써 불가피하게 초래하게 한 힘 가운데 하나가 이러한 결과를 불러왔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오키나와 문학에서 배운 것, 그 너머

 

그렇게 길지 않은, 하지만 집중적인 오키나와 문학 독서체험 속에서 내가 생각해 온 것은 다음과 같다.

오키나와 문학은 모든 마이너문학이 그러한 것처럼 정치적이며, 야마토의 모든 투쟁(그것은 당연히 오키나와 속의 '야마토'와의 투쟁과 연결되어 있다)을 포함하기에, 야마토의 독자는 오키나와 문학에서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야마토의 독자는 오키나와 문학을 통해 야마토 문학에서 너무 투명해서 보이지 않는 자신의 추한 모습과 정면으로 대면하게 되면서, 격렬하게 동요하게 된다.

 

야마토가 지금까지 가한 정치적 폭력의 상상을 초월하는 퇴적(堆積)을 보자면, 독자의 이러한 당혹함과 낭패스러움 그리고 동요는 거의 전율에 가까운 것이다.

하지만 야마토의 독자는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거기서 멈춘다고 한다면, 세계 속에서 이미 제 자신의 모습밖에 발견할 수 없는 문화제국주의를 내면화한 자학적인 독자로 남는 수밖에는 없다. 오키나와 문학을 읽으면서 그러한 사고를 하는 독자는, 오키나와 문학을 통해 '위로(치유)'를 바라는 경박한 독자이거나, 스스로의 우월함을 확인하려는 단순하고 방만한 독자보다 한층 귀찮고 성가신 독자일지도 모르겠다. 오키나와와 대면할 경우에만 참회하는 독자는, 그로 인해 야마토의 우위를 되묻지 않은 채로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고 만다. 이러한 독자는 자신이 서있는 장소에서는 싸울 수 없는(투쟁하지 못하는) 것이 꺼림칙하기 때문에, 마이너리티 문화에 과도한 전투성을 요구하는, 천박하고 추한 지식인과 겹쳐질 것이다.

 

야마토 독자가 오키나와 문학을 통해 배우는 것이 있다면, 오키나와 문학이 전개하고 있는 투쟁에, 독자 스스로가 야마토 내부에서의 싸움을 통해 연대해나가는 것이리라.

 

물론, 투쟁이 그 어떠한 형태라도 좋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호응은 오키나와 문학에서 무엇 하나 배우지 않은 야마토적인 방만한 태도의 변종이다.

 

야마토 독자에게 중요한 것은 오키나와 문학에 나타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야마토를 대상으로 한 투쟁이, 야마토 내부에서 벌어진 투쟁의 과오와 쇠약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깨닫고, 그러한 한계를 돌파하는 싸움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한계를 통해 다양한 투쟁 방식을 되묻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존재양식, 다른 연대 방식을 발견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투쟁이 쇠약해 진 것이 인간적 차원의 쇠약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다른 방식의 투쟁이라 함은 다른 식의 살아가는 방식, 다른 형태의 인간을 향해 가는 통로라고 해도 좋다.

 

 

아마 오키나와 문학도 오키나와 문학 애독자와 이해자를 야마토에서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키나와 문학은 자신이 투쟁하고 있는 야마토 내부에서, 야마토와 대항하는 독자(스스로의 야마토성과 싸우고 있는 독자)를 무엇보다 요구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야마토의 독자는 그것에 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지하고 있는 것처럼, 오시로 다쓰히로의 <칵테일파티>는 오키나와인의 "절대적인 불관용(不寛容)"이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자기 자신과 싸우지 않는 야마토의 독자는, 오키나와가 발신한 이러한 말을 통해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

 

나는 오키나와문학을 읽을 때마다, 내 자신의 거만하고 추악한 야마토 근성이 드러나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그로 인해 내 안의 일상적인 싸움이 생생하게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오키나와 문학의 작자와, '저항의 공동투쟁'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지점을 향해, 스스로 부단히 노력하고 싶다.

 

오키나와문학을 시작으로, 정치적인 더욱이 문화적인 싸움을 현재화(顕在化)해 가는 마이너문학이, 스스로의 싸움을 의식하는 많은 독자들을 배출해내고, 그 독자들로부터 또한 새로운 싸움을 표현하는 문학의 필자가 나타나기를, 나는 고대해 마지않는다. 아니, 그것은 염원이라고 하기 보다는 더욱 사실에 가까우며, 앞으로의 전개를 바라보는 확신에 가까운 것이다.

헤노코에서 찍은 사진

 

 # 이 글은 모 잡지에 게재했던 내용을 블로그에 맞게 편집한 것임을 밝혀둔다. 다만 최종 게재본이 아니라서 초벌 번역을 약간 손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