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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벽을 넘어/국내 및 동아시아

도쿄 고토쿠지 방문 기록-마네키네코의 발상지, 이이 나오스케 무덤

by DoorsNwalls 2024.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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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타가야는 나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이곳에서 지낼 대 머리가 복잡해 지면 항상 찾던 곳이 있다. 바로 고토쿠지(豪徳寺), 호덕사다. 처음에는 이곳이 마네키네코(招き猫)의 발상지인지 모른 채로 다니다 몇 번 방문 한 후에 알게 됐다. 마네키네코는 직역을 하면 '불러들이는 고양이'이다. 

고토쿠지

 고토쿠지=마나케네코의 발상지 


세타가야에 위치한 고토쿠지(豪徳寺)는 일본 도쿄에서도 독특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사찰이다. 원래 1480년에 '고토쿠인'(弘徳院)이라는 이름으로 건립된 이 사찰은, 1633년에 세타가야가 히코네번의 영토가 되면서 이이 가문의 사찰로 지정되었다. 이후 고토쿠지로 개칭되었고, 대명가의 사찰로서 격식을 갖춘 가람과 묘역이 세워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에도 시대 대명가 묘지의 형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국가 지정 사적이기도 하며, 특히 주변 사찰 중에서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고토쿠지 입구
고토쿠지에서
고토쿠지=마나케네코의 발상지
고토쿠지=마나케네코의 발상지
고토쿠지=마나케네코의 발상지
고토쿠지=마나케네코의 발상지
고토쿠지=마나케네코의 발상지

고토쿠지가 ‘마네키네코’의 발상지로 알려진 것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기반한다. 어느 날 히코네번의 번주가 매 사냥을 마치고 고토쿠지 인근을 지나던 중, 사찰 문 앞에 있던 고양이가 손을 들어 부르는 듯한 동작을 했다고 한다. 이에 흥미를 느낀 번주는 사찰로 들어가 잠시 머물게 되었다. 그 순간, 갑자기 번개와 함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덕분에 번주는 비를 피할 수 있었고, 사찰에서 스님과 이야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 경험에 감명받은 번주는 사찰을 지원하게 되었고, 고양이의 행운을 기리는 상징으로서 마네키네코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마네키네코가 행운을 불러오는 상징으로 여겨지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고토쿠지는 일본의 마네키네코 문화를 상징하는 장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고토쿠지=마나케네코의 발상지
고토쿠지=마나케네코의 발상지

고토쿠지의 고양이와 쥐는 사이가 좋은 편이다. 삼층탑을 둘러싸듯이 배치된 십이지의 동물들 중, 자세히 보면 ‘자(子, 쥐)’ 자리에는 마네키네코(행운의 고양이)가 놓여 있다. 고양이가 쥐에게 속아 십이지에 선택되지 못했다는 설도 있지만, 고토쿠지에서는 사이좋게 함께 지낸다. 또한 십이지는 ‘자와 고양이’는 북쪽, ‘묘(卯, 토끼)’는 동쪽과 같이 각 방위에 맞춰 배치되어 있다.
 
고양이와 쥐가 사이 좋게 지낸다니 신기한 일이기는 하다.
 
고토쿠지에 있는 이이 나오스케 무덤 



고토쿠지에는 또 다른 인물인 이이 나오스케의 무덤도 있다. 

고토쿠지에 있는 이이 나오스케 무덤 가는 길
고토쿠지에 있는 이이 나오스케 무덤 사적지 안내문

이이 나오스케(井伊 直弼)는 일본 에도 시대 말기부터 막부 말기까지 활약한 히코네번의 16대 번주로, 막부의 다이로(大老, 정치 고문)로서 일본의 개국과 근대화를 추진한 인물이다. 특히, 1858년 일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이 세계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지만, 동시에 국내의 반대 세력을 강력하게 탄압하며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이라 불리는 숙청을 진행했다. 

고토쿠지에 있는 이이 나오스케 무덤

그러나 이러한 강경한 정책으로 인해 반발을 사게 되었고, 결국 사쿠라다문 밖의 변고(桜田門外の変)에서 암살당하게 된다. 나오스케의 무덤은 그가 속한 이이 가문의 역사를 기념하는 고토쿠지 내에 위치해 있어, 일본 근대사와 연관된 중요한 장소로 남아 있다.

사쿠라다문 밖의 변고를 그린 그림

사쿠라다문 밖의 변고를 다룬 영화 등을 보면 1860년 3월 24일 에도성 사쿠라다문 밖에서 일어난 사건은 눈이 내리는 날에 일어났다고 한다. 도쿄에 좀처럼 눈이 내리지 않는데 이 날은 눈이 내려서 더욱 강렬하게 사람들에게 각인된 사건이었던 듯 하다.

고토쿠지 사찰 안의 보살들

 이 사건의 배경에는 나오스케가 추진한 개국 정책과 강경한 탄압이 있었다. 당시 나오스케는 일본을 개방해 서구 열강과 통상 조약을 맺고자 했으며, 특히 1858년 미국과의 일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통해 개국을 실현했다. 그러나 이 조약 체결은 막부 내외의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특히 조정과 일부 다이묘들 사이에서는 외세를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다. 나오스케는 이에 굴하지 않고 반대 세력을 강력히 억압하면서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이라 불리는 대대적인 숙청을 실시해, 반대파 인사들을 대거 탄압하고 체포했다.
 
사쿠라다문 밖의 변고는 이이 나오스케의 이러한 강경한 정책에 불만을 품은 사쓰마 번과 미토 번의 존왕양이파 무사들이 결집하여 일으킨 암살 사건이다. 이날 에도성의 사쿠라다문 밖에서 나오스케가 가마를 타고 출근하던 중, 무사들이 급습해 나오스케를 살해했다. 이 사건은 존왕양이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일본 사회는 막부의 권위가 흔들리고 존왕양이파 세력이 더욱 성장하게 되는 등 정치적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사쿠라다문 밖의 변고는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며, 막부 말기의 정치적 갈등과 개국을 둘러싼 사회적 혼란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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