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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문 안에서/연구와 번역

토마스 송 선생님(1929 - 2014)의 명복을 빌며.

by DoorsNwalls 2015.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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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안부 인사를 드리려 하다가 약간 불길한 예감이 들어 구글에서 선생님 성함을 넣고 검색을 했더니 오비추어리가 떠있었다.)


토마스 송 선생님의 본명은 宋恩津으로 조선 에스페란토 학회 회원인 宋禹憲의 
아드님이다. 선생님과 처음 만난 것은 2012년 봄 필라델피아
에서였다(하타노 세쓰코, 이정화 선생님 동행). 


1시간 가량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후 몇차례 메일 교환을 하며 
만주국 시기의 사진을 여러 장 받았고, 守隋一의 서고에서 살았던 이야기 등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토마스 송 선생님은 아버지 宋禹憲과 어머니(의사, 도쿄에서 유학)와 함께
만주국으로 이주해 살면서 1946년 다이렌에서 탈출하기 전까지 
에스페란토어, 영어, 일본어를 배웠다. 다만, 조선어는 배우지 못했다고 
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기서는 적지 않겠다.
따라서 토마스 송 선생님과의 메일 교환은 영어 혹은 일본어로 이뤄졌다. 


1946년 다이렌을 탈출한 송 선생님은 이후 미군 병사의 도움을 받아 1948년
미국으로 가게 된다. 미국에서는 1949년 무렵 아이비리그 대학 중 하나인 
다트머스에 입학. 더 자세한 정보는 오비추어리에 나와 있다. 


"He was a graduate of Dartmouth College, Class of 1953 and held double 

masters degrees from the University of Michigan. He served in the U.S. Army from 1954-1957. 

He was Associate Director of Libraries at Bryn Mawr College from 1969-1987. He later directed the

 matching gifts program at Cigna Foundation in Philadelphia, retiring in 1995."

(...)


지금 내 책장에는 2012년 3월 21일 토마스 송이라고 사인된 
Owen Lattimore가 쓴 Manchuria-Cradle of Conflict (1932)
책(오웬은 송 선생님의 스승이다)가 꽂혀 있다.

선생님과 마지막으로 메일을 주고 받은 것은 2012년 말 정도였다. 

"もう今は土曜日の午後8時。
アナスタシアはとっくに北京巡回を始めていることでしょうね。
またね、
T/"

(...)


토마스 송 선생님의 일생은 해방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조선인 역사의 
한 페이지이다. 이런 분들의 인명 사전 정도는 한 권 쯤 있어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다. 

살아계실 때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다시 만나자고 두 손을 꼭 쥐시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토쿄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자라고, 미국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宋恩津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


2012년 중반 무렵부터 갱신이 멈춘 선생님의 블로그
http://ameblo.jp/thomas-pen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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