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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문 안에서/연구와 번역

오구마 히데오, ‘변방’의 시어로 ‘중심’을 해체하다

by DoorsNwalls 2016.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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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토피아』50/2014년 여름/에 수록했던 글입니다. 전체를 다 올리면
저작권에 문제가 있으니 일부만 올립니다. 전체를 다 읽고 싶으신 분은 리포피아 측
홈피 링크를 따라가시면 됩니다. 


특집|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시


오구마 히데오 


                                         


오구마 히데오(小熊秀雄, 1901~1940). 그는 1931년 프롤레타리아작가 동맹 가입한 후, ‘자유’, ‘반역’, ‘인민 정신의 활기를 시로 표현했다오구마 문학이 만개하기 시작하는 시기는 프로문학 운동이 탄압을 받고 와해된 1934년 이후다.하지만 그는 이 시기 생활고에 시달렸으며도쿄에 살면서 열아홉 차례나 집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기도 했다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장편 서사시나 풍자적 시를 전개하며 독자적 시세계를 구축해냈다중일전쟁 하에 지은 유민시집(流民詩集)(1940)은 대표적인 작품이다다만 이 작품은 검열로 인해 출판되지 못하고 일본이 패전 한 이후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에 의해 빛을 보게 된다


사계死界로부터 /(1935년에 수록된 시)

자네들은 산 인간 세계를
나는 죽은 인간 세계를 
삶과 죽음, 그리고 이 두 세계를
자네들과 내가 점유하세 
그리고 이 두 세계에 속하지 않은
것들을 함께 공격하세, 
이 두 세계에 속하지 않는 것이 
과연 있을까, 
있지―、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것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시대여, 
육체에서 
마지막 한 방울의 피를 
넘쳐 떨어뜨리는 순간까지, 
죽음의 두려움을 
몰랐던 사내를 위해서 
나는 죽음의 문을 열지 않으리
그 넋이여, 
아무데나 떠돌아 다녀라,
우리 사계에는 
아무런 기관機關도 없고,
죽은 것들을 위해서는 
삶의 세계에 속한 자네들 기록 계원이
펜을 집어 들겠지, 
다시금 살아있는 인간의 
행동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 
자네들 세계에
새로운 묘표墓標를 수도 없이 
세우시게나,
산 세계에는
죽음의 자유인이 많지,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완전하다는 의미로
그의 자유이며 
또한 무력함이었지,
나는 이 죽음의 극좌주의자를 위해서
내 죽음의 문을 열지 않으리
모든 자유라 함은
의식된 필연이 아닌가,
죽음도 물론 삶의 감동에
대답할 정도의 높이 있지 않다면 
 자네의 인간으로서의
육체는 멸해가고
구더기 한 마리를 살리는 것에 불과하지
자네 생각은 어디에서 살고
어디에 기록됐나
맹인이여,
그대는 몇 명의,
노동자를 분기시켜,
Hektograph 판으로
몇 장의 선언문을 인쇄했는가,
몇 번, 몇 개의 다리를 건너
몇 번 여자에게 미쳐봤는가,
공개하시게나
자넨 죽어있어 
자넨 말을 할 수 없어
자네가 의지意志를 전달한 자가
그것을 후세에 전할 뿐,
하지만 누구도 증명하고
전달하지 않아,
자네의 넋은 헤맬 뿐,
자기의 좁은 필연성에
어리광을 부려 탈락하고
죽어간 것들이여, 
영웅처럼 붙잡혀서
소인배같이 감옥에서 고뇌한 자여,
어째서 거꾸로 하지 않나, 
소인배처럼 붙잡혀서
영웅적으로 죽어간
무수의 겸손한 벗들을 나는 알고 있다,
죽음의 경홀輕忽은 재촉하지 않는다,
그는 쫓겼다,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곳에 권총은 없었다
그는 허둥대며 왼쪽 호주머니를 찾았다
거기에는 그것이 있었다,
그는 자기의 관자놀이에 사격한다,
그 망설임은
사랑스럽다,
인간적인 이 사내의 진실은,
결코 오른쪽에도 왼쪽에도
어느 쪽 호주머니에도 없었다, 
진실은 그 중간에 있었다, 
그것은 두뇌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나는 사계에서
농염한 쪽빛 삶의 세계를 들여다 본다
가만히 자네들의 옆
붉은 램프를 주시하고 있다
불빛과 생명의 명멸을, 
휙 불빛은 꺼졌다 
암흑 속에 자네들과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뻔한 일이다,
등불이 켜지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
시간의 변화 속에
켜지지 않는 램프를
놓는 것은 좋지 않다,
삶과 죽음 사이에 깜박이는 불, 
가까이 다가서기 힘든 것에
다가설 수 있는
최초의 사내들은
성냥처럼 완전히 타들어 가겠지
그리고 완전히 등불은 켜질 것이다,
나는 그를 위해 죽음의 문을 열리라,
사계에는 삶의 감동을
선물로 갖고 와주게나,
죽어서 세상을 헤매는 말을 하는 무리들은
죽음 문의 철 문짝 앞에서 쓸데없이 소란스럽다
탈락하며 살고
말을 하는 자는
초조함과 무감동으로
말을 할 때마다 자기 혀를 깨문다,
침묵하고 있는 의무를
부여받은 것을 그는 모르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자死者를 맞이하기 위해서
문을 단장하고 나는 기다린다
소박하고 격정적인
행위는 찬미받으리,
죽음은 앞다리로,
삶은 뒷다리로
뒷다리는 언제나
앞다리에 아첨을 떤다,
이 절름발이 말의
추태를 위해,
쓸데없이 흙은 엉망이 된다
준마의 활달한 발걸음
그 아름다운 조화여,
생사가 주는 감동의 고양을 위해서
나는 죽음의 문을 열어젖히리라.

 

‘홋카이도’와 ‘전향’은 오구마 히데오의 시세계를 이해하는 두 개의 키워드다.
그는 제국의 중심에서 벗어난 홋카이도나 아키타, 그리고 사할린에서 생활하며 동시대 작가들과는 다른 주변 인식과 국경 감각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환경에 결정된 시인이라는 것은 아니다. 변방의 감각은 주로 중심을 향한 뜨거운 욕망으로 이어지기 쉽지만, 반대로 외부(타자)를 향한 이해심을 키우기도 한다. 그가 도쿄에서만 생활했다면 어쩌면 그는 국경 너머를 피상적으로 사유하는 것에서 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구체적으로 타민족의 삶을 상상하고 아파한 시인이었다. 그가 조선과 아이누에 대해 쓴 시편들에는 ‘내지인’으로서의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부정하는 한 일본 시인의 피투성이 시어들이 텍스트 사이로 흘러내린다. ‘강탈’과 ‘박탈’이 혼합된 땅끝과 이어진 홋카이도는 근대 이후, 많은 일본 작가들을 배출했다. 그곳에서 태어났거나 혹은 그곳을 거쳐간 많은 작가들은 불행하게도 궁핍(질병)과 전향, 자살 중 하나로 생을 마감한 경우가 많다. 이시카와 다쿠보쿠, 아리시마 다케오, 코바야시 다키치, 시마키 겐사쿠 등이 그랬던 것처럼.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오구마의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홋카이도 출신 오구마는 일본의 북방을 거점으로 국경 안팎의 마이너리티 문제를 그 어떤 일본 시인보다도 구체적 시어로 포착해 내는데 성공한다. 그의 시는 아이누, 조선인, 중국인의 국경 안팎에서의 궁핍하지만 씩씩한 삶을, 샤모和人, 일본 본토인, 야마토인, 일본인 비판을 통해 구체적 언어로 조형해 낸다.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1886~1912)와 오구마 사이에 직접적인 영향관계 내지는 시적 유사성은 많지 않다. 하지만, 국경 너머를 인식하는 '지식인의 윤리'라는 측면에서 볼 때 두 시인은 이어져 있다.
오구마는 타쿠보쿠 시에서 확보하지 못한 구체적인 시각과, 나카노 시게하루 식의 한계를 노출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는 다른 양태의 타 민족 인식을 보여줬다. 1935년 이후에 발표된 날으는 썰매ぶ橇(1935), 「장장추야長長秋夜(1935), 유민시집流民詩集(1940)은 그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집들 속에서 오구마가 국경(경계) 너머를 인식하는 두 가지 방식을 보여준다. 첫째는, 지정학적인 국경을 사이에 두고 타자를 생경한 정치 구호가 아닌, 타자의 삶 속에 뿌린 내린 문화나 정서를 통해 드러낸다. 둘째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통해 실패한 자신들의 ‘운동’을 반추하는 형식이다. 여기에 소개한 「사계로부터」는 후자에 속하는 시편들이다. 또한, 이 시는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의 뼈아픈 역사를 보여준다.


일본 문학사에서 ‘전향’은 1930년대를 대표하는 키워드였다. 고바야시 다키치가 고문사(1933. 2. 20)를 당한 것은 한 지식인의 결사항전을 상징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 이후 프로문학의 패배를 의미하기도 했다. 목숨을 걸고 싸운 결과가 죽음이라면, 남겨진 자들의 공포는 극대화 된다. 코바야시의 고문사로부터 불과 세 달 후, 일본공산당위원장, 사노 마나부와 나베야마 사다치카가 옥중에서 전향성명을 발표한 것은 공포심이 사상을 뛰어넘어선 사건이기도 했다. 그 후 이른바 전향문학의 시대가 열리는데, 과거 프롤레타리아 작가들은 자신들이 ‘공포’를 이기지 못한 ‘비겁함’을 고통스럽게 써내려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통해 그들은 공포를 극복한다. 오구마가 왕성하게 시를 발표한 1935년 전후는 전향문학의 유행과 더불어 순문학의 부활로 불리는 ‘문예르네상스’의 시기였다. 뒤집어서 말하면 ‘문예통제’가 본격화된 시기로, 프로문학의 몰락과 치안의 강화가 순문학의 일시적인 유행을 낳았다.
고바야시 다키치의 고문에 의한 죽음 이후, 전향문학의 횡행과 제2차 세계대전의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한 시기, 오구마는 서정시에서 장편 대서사시로 작품 세계의 변모를 시도했다. 「사계로부터」는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시기, ‘동료’들이 사상범으로 몰려 전향을 하거나, 혹은 죽어간 것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가 “죽음의 문”을 열고 닫는 화자의 결연한 행위를 통해 극대화 된다. 이 시는 그런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의 좌절, 그리고 코바야시 타키치의 고문사, 그후 잇다른 전향 문제를 바라보는 비전향 시인의 ‘자유’ 비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시에는 결연히 탄압에 맞서 싸운 동료들에 대한 찬사도 담겨있다. 이른바, 비전향자 오구마 특유의 죽음과 삶에 대한 결연한 각오를 이 시를 통해 읽어낼 수 있다.
죽음의 세계로부터 산자들의 세계의 문을, 변방에서부터 중심의 세계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시어들. 그것을 오구마 시세계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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