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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문 안에서/기억과 장소

하루키 라이브러리 The Haruki Murakami Library / 도쿄 와세다대학

by DoorsNwalls 2024. 8. 25.

몇 해 전에 개관한 하루키 라이브러리에 다녀왔다. 이번이 개관 후 두 번째 방문이다. 첫 방문은 코로나 시기였기에 한적한 분위기 속에서 천천히 둘러볼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워낙 익숙한 공간에 지어진 라이브러리라 그런지 오히려 낯선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하루키 문학과의 인연이 꽤 오래되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하루키의 작품을 읽기 시작해, 그동안 발표된 거의 모든 소설을 읽었다. 수필과 에세이를 제외하면 하루키의 주요 작품들은 모두 접했을 만큼 그의 작품 세계에 깊이 빠져 있었던 시기가 있다. 다만 중간에 약 10년 정도는 그의 작품을 멀리했던 시기도 있었다. 어쩌면 그 당시 하루키 문학이 주는 감정이나 분위기와 내가 맞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구마 겐고 건축가가 지어서 더 유명한 하루키 라이브러리

 

 

이번 방문에서 다시 느낀 점은, 하루키 라이브러리가 하루키 문학을 박제하지 않고 동시대적 감각으로 잘 살려낸 공간이라는 점이다. 라이브러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구 건물의 외형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구마 겐고가 설계를 했다고 들었다. 오래된 건축의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가미해 문학과 건축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많은 문학관을 다녀봤지만, 이렇게 한 작가를 ‘신화화’하지 않으면서도 그 정신을 유지하는 곳은 찾기 힘들다.

 

The Haruki Murakami Library

 


이는 아마도 하루키 자신이 신화화되거나 박제화되는 것에 대한 생리적인 거부감이 있기 때문인 듯하다. 하루키는 인터뷰나 공식 석상에 나서는 것을 매우 꺼려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도 현실에서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신비하고도 내밀한 세계를 탐구하는 인물들이 많다. 라이브러리 또한 그와 같은 하루키의 철학을 반영해, 그의 문학적 상징들을 자연스럽게 배치하고 있었다.

하루키 라이브러리의 백미인 터널 공간

 

 

라이브러리 곳곳에 하루키 소설의 상징물을 찾을 수 있다. 양 사나이 발견!

하루키 소설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양 사나이

 

라이브러리 곳곳을 둘러보다가 발견한 것 중 하나는, 그의 대표적인 캐릭터인 양 사나이였다. 양 사나이는 하루키의 초기작인 양을 쫓는 모험에 등장하는 독특한 캐릭터로, 이곳에서도 그 상징이 눈에 띄었다. 또한, 하루키가 오랜 시간 동안 번역가로 활동해온 만큼, 라이브러리 전시에서는 하루키의 작품을 번역해온 번역자들에 대한 깊은 존중이 느껴졌다. 하루키 문학이 전 세계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데에는 그의 글을 다국어로 번역한 이들의 공이 크다는 점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하루키 자신이 번역가로도 활동했기에, 그는 항상 번역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번역이 없었다면, 하루키 문학은 지금처럼 세계적으로 사랑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라이브러리에서도 그가 번역에 대해 가졌던 철학과 태도를 느낄 수 있는 전시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국어 번역본이 보인다

 

라이브러리를 천천히 둘러본 후, 1층에 있는 카페에서 일행과 함께 커피를 시켰다. 나는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는데,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한적한 카페에서 마신 커피는 그날의 문학적 여운을 조금 더 깊게 만들어주었다. 소설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음악이나 음식처럼, 이곳에서 마신 커피 역시 하루키의 소설 속 한 장면 같았다.

문학관을 떠나며, 이곳이 단순히 하루키의 작품을 기념하는 공간이 아니라, 그의 문학적 세계를 끊임없이 확장하고 탐구하는 하나의 플랫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키 라이브러리는 그를 기억하기 위한 공간인 동시에, 그의 문학이 계속해서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이번 방문은 단순한 추억을 넘어, 하루키 문학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까페에서 주문한 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