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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벽을 넘어/미국 및 유럽

카프카의 도시 프라하-카를교, 프라하성 산책

by DoorsNwalls 2024. 10. 3.

오스트리아 빈에서 프라하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나흘 동안의 여정을 마치고 프라하로 이동했다. 그런데 여기서 예상하지 못 했던 약간의 헤프닝이 발생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오전 6시 20분 기차로 이동을 해야 하니, 6시까지는 기차역에 도착해야 하는데 트램을 잘못 타서 진땀을 흘렸다. 트램을 갈아타고 가야 하는데 잘못된 번호의 트램을 타는 바람에 우버를 타지 않는 한 기차를 놓치게 됐던 것이다. 잠이 덜 깨는 바람에 일어난 일인듯 하다. 
 
그래서 트램에서 내려 우버를 불렀다. 시간이 촉박하니 우버 요금도 프리미엄 외에는 선택지가 없어 25유로 쯤이 아니라 40유로 가까이 나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차를 놓치면 이후 여행 일정이 모두 꼬여버리니. 우버에 타서 기사님께 기차 시간을 알려주니 6시 5분 쯤 빈 역에 내려주셨다. 
 
바로 플랫폼으로 이동하며 아래 사진을 찍었다. 우버로 15분의 여유를 얻어서 사진도 찍고 화장실에도 다녀올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빈 역에서 프라하로 가는 길/ 빈 역에서

빈에서 프라하까지는 4시간 반 쯤 걸렸다. 멋진 오스트리아의 전원 풍경을 보고 부족한 수면 시간을 채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유럽은 도시와 도시 사이에 광활한 초원 지대와 밭이 존재해서 계속 보고 있으니 신경이 안정되면서 스르륵 잠이 들었다. 초록의 힘인듯 하다.

프라하까지 타고 갔던 레일제트
기차를 타고 프라하로 가는 길

졸다 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곧 프라하역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유럽 도시 중에서 꼭 가보고 싶었던 곳 중 하나가 프라하였기에 큰 기대감을 품고 플랫폼에 내렸다. 프라하는 카프카가 살았던 도시이기에 이곳에 온다면 나홀로 카프카 투어를 하리라고 오래 전부터 마음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러하 역에 도착해 사진을 찍었다
프라하역 플랫폼

 
 프라하 시내를 둘러보다 카를교로


 
프라하에 도착해 호텔에 짐을 풀고 근처에서 케밥으로 간단히 점심을 먹은 후 행사장으로 이동했다. 프라하에 온 당일과 다음날 오전까지는 일을 해야 해서 시내를 둘러볼 시간이 전혀 없었다. 이하 사진부터는 일을 끝내고 이튿날 부터 프라하시내, 프라하성을 둘러본 기록이다. 

프라하성으로 가는 카를교

블타바(몰다우) 강 주변을 천천히 걸어다니며 프라하 시내 경치를 즐겼다.

프라하성으로 가는 카를교
프라하성으로 가는 카를교
프라하성으로 가는 카를교

호주에 와서 이 악기가 호주 원주민들의 악기인 디저리두라는 사실을 알았다. 신기한 소리가 나서 한동안 들었던 악기라 사진을 찍어두었다. 카를교에서 디저리두라니 묘한 조합이기는 하다.

프라하성으로 가는 카를교

카를교를 건너며 다리에 있는 동상 30개를 천천히 둘러봤다. 보헤미아왕국 신성로마제국 시절인 1402년에 건설된 다리를 지금도 걸을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 다리 위에서 신성로마제국 시기부터, 오스트리아제국의 지배 시기, 체코슬로바키아 시기, 나치의 점령 시기, 동서냉전 시기, 1989년 이후 자유화 시대의 굴곡진 역사가 쓰여 나갔다. 그러다 보니 카를교는 단순히 이동할 수 있는 다리가 아니고, 정치가 요동 칠 때마다 많은 이들의 죽음이 전시된 장소이기도 했다.

성 얀 네포무츠키의 동상
성 얀 네포무츠키의 동상 하단


카를교를 걷다 보면 사람들이 유독 몰려 있고, 동상 하단의 부조된 부분을 손으로 만지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간단히만 정리하면, 14세기 말 바츨라프 4세 국왕의 왕비가 대주교 대리인 네포무츠키에게 고해성사를 했는데, 국왕이 그 내용을 알려달라고 했지만, 강직한 네포무츠키는 이를 거절한다. 이에 화가난 국왕이 그러면 다른 생명이 있는 것에게라도 말하라고 하자 그는 개에게 말을 한다. 그 결과 다른 사건들도 함께 있었지만 국왕이 그를 체포하게 해 혀를 자르는 고문 등을 한 후 죽여서 카를교에서 볼타바강으로 던져버렸다.
 
그런 순교의 이야기는 몇 세기를 걸치며 하나의 전설이 되었고 17세기에 카를교에 그의 모습이 성상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처형당해 강에 던져지는 네포무츠키와 개, 그 장면을 강제로 지켜보는 왕비의 모습이 부조된 부분을 만지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민간 신앙으로 자리잡아갔다. 관광객이 성 얀 네포무츠키 동상 하단에 몰려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용을 알면 꽤나 잔인한 장면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카를교를 지나 프라하성으로 올라갔다. 
 
카를교에서 프라하성, 황금소로 카프카의 흔적을 찾아서


카를교에서 프라하성으로 가는 길은 언덕길이 이어져서 올라간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프라하성으로 가는 길

가는 길에 유명한 프라하 초콜릿 가게가 있어서 시식도 하고, 선물용으로 두 개 사서 백팩에 넣었다.

프라하성으로 가는 길

걷는 것을 좋아해서 그렇게 힘들다는 느낌은 없다. 프라하의 명물인 붉은 지붕과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 올라갔던 것 같다.

프라하성으로 가는 길
프라하성으로 가는 길

이제 프라하성에 거의 도착했다. 앞쪽에는 경비병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대통령의 관저가 있다. 히틀러가 프라하를 점령한 이후 프라하성에서 머물렀다고 하는데 바로 이곳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나치 점령 시기,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시절에는 독일에서 파견된 총독이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정확히 여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프라하성 어디 쯤이다.

프라하성에서

 대통령관저를 지나서 성 비투스 대성당으로 향했다. 이곳은 1344년 건축을 시작해서 600년 동안 건축을 계속했다고 한다. 600년이라니, 한국으로 치면 조선왕조 시작부터 지어도 마지막 왕이 퇴위할 때까지 다 짓지 못 할 시간이다. 유럽을 다니며 성당은 너무나 많이 봐왔기에 안에만 살짝 둘러보고 최종 목적지 카프카의 작업실이 있던 황금소로로 걸음을 서둘렀다. 

프라하성에서
프라하성에서
프라하성에서

마침내 목적지인 황금소로에 도착했다. 그런데 날짜를 잘 못 골라서 이 날은 가게들이 모두 문을 닫았다. 고즈넉하게 황금소로를 걸어다닐 수는 있지만 안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사람들로 붐벼야 하는 곳인데 약간 쌀쌀한 4월 날씨와 합쳐져서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프라하성에서
프란츠 카프카의 작업실이 있던 곳 창

 
이 창문이 있는 건물이 바로 프란츠 카프카의 작업실이다. 1916년부터 1년 동안 이곳에서 낮에는 보험회사 직원으로 일하며 밤에는 소설을 썼다고 한다. 여기서 쓴 소설이 바로 <성>이다. 처음 <성>을 읽었을 때 성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고는 했는데 프라하성을 보니 구체적으로 그 모습이 그려졌다. <성>은 시작부터 잘 보이지 않는 성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K가 도착한 것은 늦은 저녁때였다. 마을은 깊은 눈 속에 묻혀 있었다. 성이 서 있는 산은 안개와 어둠에 휘감겨 전혀 보이지 않았고, 거기에 커다란 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희미한 불빛 한 점 없었다." <이재황 옮김>
 


 

프라하성을 보고 나와서

프라하에 도착한 첫날은 업무로 바빴지만, 다음 날부터는 본격적으로 프라하를 둘러보았다. 블타바강을 따라 천천히 걷고, 카를교를 건너며 30개의 동상을 감상했다. 특히 성 얀 네포무츠키의 동상 앞에 사람들이 몰려있는 것을 보며 그의 순교 이야기를 떠올렸다. 카를교를 지나 프라하성으로 이어지는 언덕길을 오르면서 붉은 지붕과 아름다운 시내 전경을 감상했다.
 
프라하성으로 가는 길은 언덕을 따라 이어져 있으며, 프라하의 붉은 지붕과 아름다운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멋진 경관이 펼쳐진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오히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중간에 유명한 초콜릿 가게에 들러 시식도 하고, 선물용 초콜릿을 사서 백팩에 넣었다. 성에 거의 다다르니 대통령 관저와 삼엄한 경비병들이 보였다. 히틀러가 점령했을 때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성 비투스 대성당을 간단히 둘러본 후 황금소로로 향했지만, 가게들이 모두 닫혀 있어서 아쉬웠다.
 
다시 언제 이곳에 올 수 있을지를 생각하며 프라하성과 황금소로를 보고 나와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프라하시내와 카를교, 프라하성 산책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