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주 오래 전 축구와 연을 맺던 시절에 썼던 글이다.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을 듯 하여 예전 글을 약간 손 봐 헛간에 넣어둔다. 이제 축구와의 연은 거의 끊어졌지만, 옛 정을 생각하면 한국 축구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숨길 수 없다.
국민국가라는 것은 근대적인 개념으로 ‘근대에 자명하다고 규정된 언어, 사상, 문화, 민족 등이 해당 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만들어졌다는 논리적 틀 속에서 타국과의 상대화를 재촉하는 개념’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듯 하다. 더 쉽게 말하면, 한 국가를 이루고 있는 민족이 동일한 언어와 사상에 의해 통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많은 지식들이 ‘국민국가’의 종언을 이야기하고 있다. 로마제국은 아니지만 지금은 또 다른 ‘제국’의 시대라는 담론이 그것이다. 물론 이는 세계 정치적인 차원에서 보면 타당한 이야기지만, 개별적인 국가의 차원으로 이야기를 옮겨보면 반드시 옳은 이야기만도 아니다.
축구에 ‘국민국가’의 논리가 어떻게 구현되고 국민들에게 각인되는지는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 사람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태극전사’라는 말은 이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또한 가까운 예로 월드컵을 앞둔 언론의 보도 행태 또한 ‘국민국가’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 가까운 일본만 봐도 자국 대표팀을 ‘사무라이 블루’라고 부르고 있다. 사무라이란 일본의 문화 아이콘이다. 그것은 타국 대표팀에게는 절대 부여할 수 없는 명칭이다.
클럽간 대항전과 국가간 대항전의 열기를 두고 일반화하는 것은 조금 어려운 측면이 있다. 유럽은 이미 자국리그 열기가 국가간의 대항전 열기에 못할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동아시아에서 국가간 대항전은 상대적으로 유럽에 비해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유럽의 국가간 대항전이 별볼일 없는 대회라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의 프로리그의 전체적인 긴장감이 유럽에 비해 떨어진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국민국가와 축구를 논할 때 ‘한국’은 매우 부정적인 측면에서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 일본 언론은 올림픽 등에 나간 한국 대표팀을 향해 병역 면제가 자극제가 됐다고 왕왕 쓴다. 그런 기사의 뒷면에는 ‘병영국가 한국에서 병역을 면제 받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뛰는 선수’라는 매우 비아냥 섞인 역설이 숨어 있다.
사람들은 축구를 매개로 정체성을 확인받고 싶어한다. 축구의 역사가 매우 깊은 유럽에서도 이는 매우 지역적인 차원에서의 정체성 확인이라는 문제로 파급된다. 그렇다면 이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다름 아닌 국민국가의 논리와 맞닿는다. 다시 국민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돌아가보자. 국민국가란 동일한 언어, 사상, 문화, 민족의 집합체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집합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시 정체성의 문제로 돌아간다. 한 국가에 사는 사람들이 그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고 사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럽의 축구에 대한 충성심과 그로 인해 파급되는 지역 커뮤니티의 형성은 내게 있어 마이너스 보다는 플러스적인 요소로 보인다.
하지만 최근 각국 국가대표 선수 중 혼혈이나 외국인 선수가 점점 늘어가는 것은 국민국가의 단일민족 논리가 탈근대 시대에 조금씩 깨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웃 나라 일본에는 국가대표 팀에 라모스와 산토스 등의 남미 출신 선수가 있었다. 물론 이것만으로 국민국가의 논리의 강약 유무를 가리는 것은 곤란하다. 하지만 이는 하나의 징후임에는 틀림없다. 아니면 제도적 개편이라고 해도 좋을 듯 하다. 하지만 여기에도 국민국가의 논리는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귀화’라는 제도이다. 제도적으로 조금은 유연해졌다고는 하지만 귀화라는 것은 이질적인 것을 동질적인 차원으로 만든다는 의미에서 전체적인 이념은 변한 것이 없다. 또한 자국에서 국가대표로 뛰었던 선수가 타국의 국가대표 선수로 뛸 수 없다는 규정이야말로 국민국가 논리와 축구의 매우 위대한? 접점이다.
유럽의 지역 커뮤니티와 축구에 대한 이야기에서 빠트린 부분으로 돌아가 보겠다. 한국은 확고부동한 국민국가 논리로 거기에 분단논리까지 합쳐져서 숨쉴 틈 없는 동일성의 논리로 점철된 공간이었다. 그런 나라에서 국가대표 경기에 관중이 넘치고 언론에서는 프라임 타임 때에 국가대표 경기를 공중파에서 중계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다. 구한말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한민족은 ‘단일민족국가 건설’에 한이 맺힌 사람들이다.
국민국가에서 축구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축구 그 자체만은 아니다. 그것은 스포츠의 차원을 넘어선 정치 경제 문화가 복합된 매우 고차원의 현대 정치 사상의 축소판인 셈이다. 한 국가의 국민중에 선택된 엘리트가 타국의 선별된 엘리트와 싸워 이긴다는 것은 전쟁 그 자체인 셈이다. 그것은 또한, 근대 국민국가가 창조해낸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 간의 치열한 인종 우열의 장이기도 하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국 축구는 그런 의미에서 국민국가의 논리에 너무나 충실한 한국사회와 꼭 닮아있다고 하겠다. 한 예로 결과 중심주의가 낳은 폐단은 한국의 도시와 생활 모든 측면에 그리고 축구에도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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