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주 오래 전 축구와 연을 맺던 시절에 썼던 글이다.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을 듯 하여 예전 글을 약간 손 봐 헛간에 넣어둔다. 이제 축구와의 연은 거의 끊어졌지만, 옛 정을 생각하면 한국 축구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숨길 수 없다.
난생 처음 야구장에 가다
축구와 야구, 야구와 축구는 한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프로가 출범했고, 가히 대한민국 양대 프로스포츠라 해도 부언을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프로만 놓고 보면 야구가 중계도 많고 시청율도 프로축구 보다는 높으나, 국가대표 경기만 놓고 보면 축구 쪽에 무게가 실린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경기 내적 요소보다 경기 외적인 요소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사실이다.
경기 내적인 측면으로 보면, 두 스포츠는 우위를 가리기 힘든 제각각의 특성과 묘미 그리고 매력을 갖고 있는 스포츠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주변을 보면 축구와 야구 둘 다 좋아하는 팬들도 있지만, 어느 한 쪽에는 정통하면서 다른 한 쪽에는 문외한이 경우가 종종있다.
야구와 축구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야구경기를 스타디움에서 본 적도 없거니와 티비로도 2-3회 이상을 본 적도 거의 없다. 박찬호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에도 야구는 관심 밖의 영역이었다. 야구팬과 축구팬 사이에는 종종 이런 설전이 펼쳐진다.
“무승부에 싸움질이나 하는 게 프로축구냐? 조기축구보다 못한게?”
“도둑 잡을 일 있냐? 방망이 들고 그건 뭐하는 건데?”
이런 식의 설전은 야구팬과 축구팬 사이에 종종 오간다. 필자는 검사와 변호사의 논방과 비슷한 말싸움을 실제로 여러번 경험한 적이 있다. 프로축구는 실제로 변호를 해줘야 하는 존재였기도 하다.
야구를 보며 가장 당황한 것이 경기가 언제 시작했는지도 모르게 어느새 점수가 1회에 3점이나 났다는 사실이었다.
“휘슬을 불지 않다니!”
“그게 야구의 재미야!”
동행한 S형은 야구에 조예가 깊었다.
내가 야구장을 처음 방문한 것도 있겠거니와, 아무 신호도 없이 시작해서는 점수가 나고 공수가 교대되는 상황은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조금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느새 1번타자에서 5번타자까지 넘어가 버리는 상황이 연출됐다.
축구의 리듬에 너무 익숙해져 있던 내게 그건 신선한 충격이었다.
도쿄돔을 가득 채운 일본 관중들을 조금 둘러보고, 야구란 원래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기장 곳곳에서는 경기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쉴새 없이 화장실 및 매점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축구였다면 순식간에 공수가 바뀌고 연속적(전후반은 물론 있지만)으로 경기가 쉴새 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눈을 뗄 수 없다. 역시 야구와 축구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연속의 미학에 익숙해져 있던 필자가 단절의 미학과 만나고 당황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경기장 문화의 차이
일본 일본 야구장에서 가장 놀란 것이 부잉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공격하는 팀의 팬들이 응원을 하고, 수비팀의 팬들은 박수만 보낼 뿐이다. 어떻게 보면 야구가 턴게임이라는 점이 이러한 문화를 낳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시간으로 공수가 바뀌는 축구에서 부잉은 막강한 홈팀의 어드밴티지이지만, 턴게임인 야구에서 부잉가지고는 그다지 심리적 압박을 느끼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하면 축구는 선수들 10명이 포지션별로 상대진영까지 깊숙히 침투해 들어가 관중과의 거리를 좁혀갈 수 있지만, 야구에서는 공의 움직임에 따라 한 두 명만이 움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중들이 만약에 부잉을 하더라도 그다지 선수들이 심리적 위축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쳤다. 이러한 야구의 특성상 팬들끼리 감정적으로 격앙되서 충돌하는 일도 별로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축구에서는 한팀이 상대 팀을 일년에 4-5차례 정도 밖에 상대하지 않지만, 야구는 연일 경기가 열리므로 그와 비교도 되지 않게 맞닥드리게 된다. 그러므로 한 게임 한 게임이 갖는 의미와 긴장감이 프로축구와는 많이 다름은 사실이다. 이러한 경기 내외적인 요인이 축구와 야구의 결정적인 차이를 양태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격정과 안정, 그 사이에서
내가 축구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함의 미학과 격정의 드라마에 있다. 야구의 룰은 축구에 비해 세분화되어 있으며, 장비 만 놓고 봐도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분법적으로 말하자면 통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축구와 통계로 설명할 수 있는 야구의 사이라고 할까.
물론 야구에도 격정은 존재한다. 야구에는 도루도 있고, 홈런도 있고, 끝내기 안타도 있다. 하지만 야구에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데이터가 있다. 한 사람의 힘이 야구는 축구보다 더욱 강조된다. 괴물 투수가 등판하면 안타를 때려내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축구에서는 제 아무리 출중한 선수가 나오더라도 능숙한 수비수들이 악착같이 따라붙으면 골을 넣기란 쉽지 않다. 몸과 몸이 직접충돌하는 축구와 상대선수와 충돌할 일이 출루 때와 빈볼시위 때 밖에 없는 야구의 차이가 여기서 비롯된다.
축구 또한 이러한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2, 3, 4부리그 팀이 FA컵에서 4강이나 결승에 진출했다는 유럽 축구 소식을 등을 종종 접할 수 있다. 아마추어 야구팀이 과연 요미우리 자이언츠나 뉴욕 양키즈와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야구공 또한 둥글지만 이러한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야구에서 느낄 수 있는 격정과 축구에서 느낄 수 있는 격정은 매우 다른 성질의 것이다. 축구선수들이 골을 집어 넣고 짐승처럼 포효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 야구 선수가 만루홈런을 치고 그런 표정과 몸짓을 짓는 것을 필자는 단 한번도 본적이 없다.
이것은 정지된 상태에서 서로간의 좁힐 수 없는 간격을 갖고 게임을 하는 야구와 항상 움직이며 선수들끼리 충돌하는 축구가 갖는 숙명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천연잔디에서 공을 땅에 굴려가며 하는 축구와 달리 야구는 공이 바닥 보다는 공중을 누빌 때가 많은 만큼, 선수들 또한 좀처럼 인조잔디에 무릎을 꿇지 않는다. 실제 그러한 차이가 축구선수와 야구선수의 에스라인을 좌우한다고 할 수 있다.
야구를 9회까지 처음으로 지켜보며 느낀 것은 경기는 물론이고 경기장 분위기 자체가 매우 평온하다는 사실이었다. 축구가 매우 말초적인 욕구(파괴본능 및 정복요구)를 충족하는 대리전쟁이라는 것이라면, 야구는 본능적인 부분 보다는 이성적인 영역의 스포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선수와 선수간의 거리와 충돌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야구에 ‘훌리건’이나 집단 패싸움이 거의 없는 것은 이러한 ‘본능’과 ‘이성’의 횡단선을 놓고 두 스포츠가 위치하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공격수의 골이 상대방의 골망을 흔들 때의 그 희열감은 야구의 안타와 홈런에서 느끼는 희열과는 다른 차원에서 쌍곡선을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어느 스포츠가 우월하고 진보적이냐는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로 축구와 야구가 갖는 각기 다른 영역일 뿐이다. 그래서 필자는 프로축구와 프로야구가 ‘제로섬 게임’의 쌍수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상생을 바라며
1983년에 출범한 K리그는 몇 차례의 부침을 거친 후 안정적으로 관중을 모으고 있다. 태생적인 한계와 행정적 무능에 비해 K리그는 양적 질적 발전을 이루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올해 프로축구와 야구는 꾸준히 관중이 늘어나고 있으며, 그 어느 때 보다도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웃나라 일본만 보더라도 프로야구와 프로축구는 각기 다른 영역에서 흥행을 하고 있으며 지역 사회와 밀착되어 있다.
한국에서 양대 프로리그인 두 스포츠가 갈 길은 어느 한 쪽이 망하기를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상생의 길이라 할 수 있다. 두 스포츠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갖고 있기에 이는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축구와 야구가 관중에게 줄 수 있는 카타르시스는 매우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축구에서 느낄 수 있는 희열과 격정을 야구에서 느낄 수 없듯이, 야구에서 느낄 수 있는 여유로움과 분석의 즐거움(야구적인)을 축구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문 안에서 > 까페, 극장, 오락실, 헛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기원 축구캐스터 특강 및 인터뷰 (0) | 2024.09.17 |
---|---|
스포츠 진흥 기본계획과 J리그의 이념 (0) | 2024.09.15 |
축구에 투영된 국민국가의 논리 (0) | 2024.09.15 |
노정윤의 ‘한일 축구문화론’ 리뷰 (0) | 2024.09.14 |
한일 축구에 관한 단상 /10여년 전의 예측 (0) | 2024.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