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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문 안에서/연구와 번역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중국기행>> 오자와 준 연구자 / 일본 측 추천문

by DoorsNwalls 2024.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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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로서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개조사改造社의 저널리즘을 둘러싸고 

오자와 준小澤純 / 아쿠타가와 문학 연구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중국기행


 

『지나유기』를 간행한 개조사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관계에 대해서 쓰고자 한다. 개조사는 정치적 야심을 계속 품고 있었던 가고시마鹿児島 출신의 야마모토 사네아쓰山本実彦(1885‐1952)가 1919년에 창업한 신흥 출판사다. 야마모토는 정치적으로는 보수파로 소년 시기에는 오키나와에서 소학교 대용교원(자격증 없이 교직에 종사)이 됐고, 야마토신문사やまと新聞社에서 일할 때는 런던 특파원으로 파견됐다. 일본군이 시베리아에 출병했을 때는 러일공동사업의 가능성을 모색했으며, 현대 중국에 대해서도 강한 관심을 갖는 등 저널리스트적인 감성이 풍부했다. 종합잡지 『개조』는 데모크라시democracy를 기치로 내세운『중앙공론中央公論』과의 차별성을 두기 위해 혁신적인 사회주의적 언설을 중심에 두고 비약적으로 잡지 발행수를 늘려나갔다.
 
그러한 가운데 『개조』는 문예란에 힘을 쏟아서 1920년에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시가 나오야志賀直哉와 친밀한 사이였던 다카이 고사쿠瀧井孝作를 시사신보사時事新報社에서 영입해 시가 나오야의 대표작 『암야행로暗夜行路』의 연재를 성사시켰다. 아쿠타가와에게는 소품을 청탁하는 정도였지만 야마모토 사장이 직접 그를 찾아가서 청탁을 해, 청나라 시대의 예술에 대한 문답을 모티프로 한 「슈잔즈秋山図」(『개조』1921년 1월)를 실었다. 

 

중국을 방문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아쿠타가와는 중국 시찰 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군인의 잔학함을 풍자해 증거 불충분인 채로 참수되는 중국인을 점묘한 「쇼군将軍」(『개조』1922년 1월)을 게재했다. 이 작품이 복자伏字투성이인 상태로 나타난 전말顚末은 당시 『오사카마이니치신문』연재 중이었던 「강남유기」에도 잠깐 나온다. 중국 시찰 직전에 아쿠타가와가 연재한 「기묘한 재회奇怪な再会」에서 청일전쟁 직후 일본군 군인에게 둘러싸인 중국인 창기의 환시幻視를 통해 제국주의적 현실을 넌지시 암시하는 정도로 그친 것을 생각한다면 「쇼군将軍」을 게재할 수 있었던 것은 『개조』이기에 가능했던 모험이었는지도 모른다. 

 

1922년 8월에는 개조사로부터 선집 『사라수 꽃沙羅の花』이 간행됐는데, 이 작품집에는 「쇼군」 외에 중국인 소녀 창부娼婦에 초점을 맞춘 「남경의 그리스도南京の基督」를 시작으로 소품, 동화, 수필 등에 이르는 전 장르가 수록됐다. 흥미로운 것은 「상해유기」의 일부인 「남국의 미인南国の美人」이 처음으로 여기에 수록돼 있는 것이다. 정치의 뒤편에 입회한 전설의 게이샤와 발랄한 서민성을 느낄 수 있는 게이샤를 대비시키는 부분이 선별된 이유로는 개조사가 새로운 미디어로 진출하게 된 것과 관련해 살펴볼 수 있다.
 
1922년 10월 개조사는 『여성개조女性改造』를 중앙공론사는 『부인공론婦人公論』에 대항할 목적으로 창간됐다. 아쿠타가와도 후일 지면에 많은 작품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 잡지는 창간호에서부터 『사라수 꽃』광고를 게재하고 있다. 다음 호인 11월호에는 '제5판'이 나왔고 『개조』가 12월호에서나 똑같은 광고를 끼워 넣은 것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확연하다. 아쿠타가와는 화장품 메이커가 출자한 잡지 『여성女性』에도 많은 작품을 집필한 후 「장강유기」를 게재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사라수 꽃』의 목차를 보면 「무도회舞踏会」, 「가을秋」, 「파葱」 등 여성 등장인물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품이 나열돼 있어서 "아쿠타가와 씨의 전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는 광고문이 실려 있는데 이는 새로운 여성 독자를 확보하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1924년 3월부터 연재된 수필 「편견僻見」에는 「상해유기」에 들어있지 않은 내용이 나온다. 아쿠타가와는 장병린이 "내가 가장 혐오하는 일본인은 오니가시마鬼が島(귀신이 사는 섬)를 정벌한 모모타로桃太郎(일본 설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다. 모모타로를 사랑하는 일본 국민에게도 다소의 반감을 품을 수밖에 없다."라는 발언을 넣었다
 
이는 제국주의적 침략이 지닌 황폐함을 시사한 패러디 소설 「모모타로桃太郎」(『선데이마이니치サンデー毎日』1924.8)를 이해하는데도 중요한 부분이다. 오사카마이니치신문사와 개조사라고 하는 양대 미디어를 상호 참조하는 것을 통해 보완된 아쿠타가와의 중국 언설은 흥미롭다. 『지나유기』가 간행된 후에도 개조사는 아쿠타가와에게 계속해서 작품을 청탁했는데, 『개조』1927년 8월호에 그리스도를 저널리스트로 해석한 「서방 사람西方の人」이 게재된 것은 특히 감개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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