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도시의 문 안에서/기억과 장소

홋카이도 오타루 탐방-이시카와 다쿠보쿠 시비와 오타루운하를 찾아

by DoorsNwalls 2024. 10. 30.
728x90

 

지난 해 겨울 일본 근대문학 답사의 일환으로 규슈에서 홋카이도까지 일본을 횡단하고 왔다. 시간순으로 쓰면 좋겠지만 카테고리별로 정리한다.


 

삿포로역에서 오타루역으로 향하는 여정은 단순히 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메이지 시대의 흔적을 찾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으로 오타루 방문은 세 번째인데 올 때마다 느낌이 새로운 곳이다.

 

열차가 서서히 출발하자, 창 너머로 펼쳐지는 홋카이도의 풍경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푸르른 들판과 평화롭게 흐르는 강물, 그리고 곳곳에 솟은 산들이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다. 한가로운 마을을 지나, 때로는 해안가를 따라가면서, 저 멀리 푸른 바다가 보이기도 한다. 열차가 경쾌한 리듬으로 레일을 달릴 때, 내 마음도 그 소리에 맞춰 점점 더 오타루를 향해 기대감으로 부푼다.

삿포로에서 오타루역으로

약 한 시간 정도 지나 도착한 오타루역에 발을 내딛으면, 먼저 역 앞에 서 있는 종이 눈에 띈다. 이 종은 메이지 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열차의 도착을 알리던 종이라고 한다. 메이지 시대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 종은, 지금은 그 역할을 다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과거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한때는 그 종소리에 사람들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역으로 달려와 사랑하는 사람을 맞이했을 생각을 하니, 이 작은 종이 꽤나 애틋하게 느껴진다.

오타루역 앞의 오래된 종

역 앞 광장에서 바라보는 오타루의 풍경은 그 자체로 옛 정취를 물씬 풍긴다. 작은 항구 도시 오타루는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한 분위기 속에, 메이지와 다이쇼 시대의 건축물이 곳곳에 남아 있어 일본 근대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역에서부터 조금만 걸어 나가면 보이는 운하와, 그 주변의 유리 공예품 상점들, 그리고 맛있는 해산물로 유명한 삼각시장까지. 역 앞에서 시작된 이 작은 여행은, 단순한 이동을 넘어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시간 여행처럼 느껴진다.

오타루역 앞
오타루역 주변 지도

 

오타루역 언덕에 있는 이시카와 다쿠보쿠 기념비


오타루 역 근처에 있는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비에는 그의 단가가 새겨져 있어, 다쿠보쿠가 삿포로에서 오타루, 그리고 쿠시로로 이어지는 여정을 어떻게 느꼈는지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이 시비는 삼각 시장 입구 부근, 역에서 조금 걸어 올라가는 가파른 언덕길 끝에 자리하고 있다. 비석 뒤로 보이는 오타루 역과 겨울의 설경은 눈 내리던 그날 가족을 떠나던 다쿠보쿠의 풍경을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게 한다.

오타루역 언덕에 있는 이시카와 다쿠보쿠 기념비

비석에 새겨진 단가는 "아이를 업고 / 눈이 휘몰아치는 정거장에서 / 나를 배웅하던 아내의 눈썹이여"라는 내용으로, 다쿠보쿠가 오타루 역에서 가족과 작별하고 홀로 쿠시로로 떠나면서 읊은 것이라 한다. 이 시에는 눈이 날리는 역에서 아내와 아이가 그를 배웅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지만, 특히 ‘아내의 눈썹’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눈썹은 어딘가 애처롭다. 가족을 두고 떠나야 하는 그의 불안과 미안함이 겹쳐 떠나는 아내의 모습이 그의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다. 꽤나 슬픈 단카이다.

오타루역 언덕에 있는 이시카와 다쿠보쿠 기념비 앞에서 바라본 오타루역

이곳은 다쿠보쿠의 처남이자 중앙 오타루 역장의 관사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다쿠보쿠는 이곳에 머무르다가 이듬해 1월 19일 눈 덮인 역에서 가족과 이별하며 쿠시로로 떠났다고 한다. 그의 일기에도 이 장면이 기록되어 있으며, "오타루를 떠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가정을 떠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라고 한 말에는 그의 복잡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쿠보쿠에게 오타루에서 쿠시로로 향하는 여정은 단순한 이동이 아닌 가족에 대한 사랑과 불안 등이 뒤섞여 있다.

오타루역 언덕에 있는 이시카와 다쿠보쿠 기념비 뒷면, 만든 이들의 이름이 늘어서 있다
오늘도 눈길 당첨이다 ㅠㅠ

일본은행 오타루 지점을 지나 오타루 운하로  


오타루에서의 하루는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듯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일본은행 오타루 지점이 자리한 금융자료관 앞에 서면, 메이지 시대의 웅장한 건축물이 내뿜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된다. 이곳은 1900년대 초 오타루가 '북쪽의 월가'로 불리며 경제적 번영을 이루던 시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과거 일본은행 오타루 지점으로 1912년에 문을 연 이 건물에는, 당시의 금융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전시가 마련되어 있다.

오타루운하로 가는 길. 가는 길에 문학관, 미술관, 금융자료관에 들를 수 있다.

실제 1억 엔 모조 지폐의 무게를 체험할 수 있는 전시가 흥미로웠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자료관 내부는 충분히 둘러보지 못한 채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오타루운하로 가는 길에 들른 금융자료관
오타루운하로 가는 길에 들른 금융자료관
오타루운하로 가는 길에 들른 금융자료관
오타루운하로 가는 길에 들른 금융자료관

드디어 오타루 운하에 도착하니, 마치 옛날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곳은 1923년에 완공되어 한때 오타루의 해운을 뒷받침한 수로였다. 지금은 그 역할을 마치고, 오타루를 대표하는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아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당긴다. 운하를 따라 이어진 석조 창고와 오래된 건물을 개조한 카페와 레스토랑이 늘어서 있는데, 이들 건축물이 만들어내는 고즈넉한 경관은 오타루 운하만의 매력을 배가시킨다. 특히 해가 질 무렵이 되면, 63개의 가스등이 하나둘 불을 밝히고 석조 창고 건물들도 라이트업되어 낮과는 또 다른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오타루운하에서
오타루운하에서
오타루운하에서
오타루 서양미술관

오타루를 떠나기 전, 추억이 서린 오르골당에 들렀다. 이곳에서 샀던 오르골이 동일본대지진 때 파손된 후로 내 마음 한 켠에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반짝이는 오르골들이 줄지어 놓여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 아쉬움이 살짝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다. 오르골당을 나와 근처 아케이드에서 중국 음식을 맛본 후 삿포로로 돌아가는 길에 오르니, 하늘에서 하얀 눈이 소복하게 내린다. 길이 미끄러워 넘어질 뻔한 순간도 몇 번 있었지만, 오타루에서 맞이한 눈 덕분에 이번 여행은 더욱 깊게 새겨졌다.

728x90